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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소설가
얼마 전부터 아예 요리를 그만두었다. 그만두었다, 라기보다는 포기했다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재능도 없고 집념도 없는 내가 마트에서 장을 보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프라이팬을 놀리는 일이 그야말로 시간 낭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이제 매주 금요일 저녁, 일주일 치 반찬을 사러 간다. 밑반찬 다섯 종류와 메인요리 다섯 종류, 그리고 국이다. 밑반찬은 반찬통에 담아두고 메인요리와 국은 냉동실에 넣어둔다. 덕분에 내 삶은 제법 여유로워졌다. 지난주 금요일에도 나는 반찬가게엘 들렀다. 2인분씩 담아놓은 국 진열대를 지나다 보니 어라, 아욱국이다. 슴슴하게 된장 풀어 오로지 아욱만 넣고 끓인 국. 국이 담긴 지퍼백을 열면 아욱 향기가 보드랍게 코를 찌르겠지. 두 봉지를 집는다.

오래전 소설 퇴고 위해 횡성 시골로
주인 할머니 마당서 뜯어온 채소 중
유일하게 제대로 먹은 것은 '아욱'


벌써 오래전, 삼십 대의 나는 어느 날 짐을 싸 들고 횡성 어디쯤 시골 마을로 기어들어갔다. "또 왜! 대체 왜! 너는 나를 잡아먹으려고 이 회사엘 들어왔니?" 상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걸핏하면 한 달씩 두 달씩 쉬겠다고 생떼를 쓰는 나를 익히 보아와서 아주 인연을 끊을 듯 굴지는 않았다. "올 때 로얄살루트 21년산으로 두 병 사 올게요, 진짜로요." 새벽 구름이 지붕에 닿을 듯 낮게 내려앉는 시골집에 수트케이스 두 개를 풀며 나는 마냥 신이 났다. 어영부영 붙잡고 있던 장편소설을 마무리하고 돌아가겠다는 야심이 있었지만 나는 쓸데없이 마당에서 빨래를 삶거나 방바닥을 구르며 음악을 듣거나 했다. 언젠가는 써지겠지, 그깟 장편소설, 언젠가는 나에게 오겠지, 나는 세상만사 다 내려놓은 사람처럼 흥얼흥얼 놀았다. 주인 할머니는 마당에 무언가를 많이도 키웠다. 마당뿐 아니라 골목이 다 텃밭이었다. "아무거나 뜯어먹어. 남의 집 것들도 괜찮아." 토끼 새끼도 아니고, 아무거나 뜯어먹으라니 나는 할머니의 말이 우스워 정말 무얼 뜯어먹을까, 동네를 시시껄렁한 얼굴로 걸어다녔다. 내가 제일 먼저 뜯어온 건 옥수수였다. 사실 나는 옥수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데, 야물게 알이 들어찬 옥수수가 너무 귀여워 한 번쯤은 몇 개 쪄먹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옥수수가 제법 커 할머니에게 큰 냄비를 빌리러 갔더니 "그건 못 먹어. 돼지 먹일 것들이야" 하셨다. 아, 돼지가 먹는 옥수수가 따로 있구나, 나는 그걸 처음 알았다. 먹지도 못할 옥수수 때문에 풀이 죽어 그다음에는 고추며 상추 같은 것들만 조금씩 따다 먹었다. 소설은 써지지 않고 날은 자꾸 흘러서 나는 자주 지루했다. 동네 슈퍼에 들렀다가 문득 할머니네 뒷마당에서 자라고 있던 파가 생각났다. 그래서 부침가루를 샀다. 파전을 해먹어야지. 뒷마당, 그러니까 내가 지내던 사랑방 들창 아래 길게 자란 파를 가위로 숭덩숭덩 잘라 부침가루를 넣고 파전을 만들었다. 내가 반찬가게에 가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나는 그때부터 요리엔 이미 젬병이었던 것이다. 내가 만든 파전 맛에 질겁해서 나는 그걸 다 버렸다. 다음날 할머니가 들창 밖에서 소리를 쳤다. "아이고, 씨 받으려고 둔 마늘잎을 누가 다 잘라갔대?" 나는 들창 안에서 대답했다. "파 아니에요, 그거? 할머니, 파인 줄 알고 파전 부쳤어요." 할머니가 입을 쩍 벌렸다. "파랑 마늘 구분 못 하는 것도 식겁하겠는데, 색시는 파전을 대파로 부치나? 쪽파로 안 하고?" 아, 그렇구나. 어쩐지 맛도 그랬지만 생긴 것부터가 이상하더라. 그날 할머니는 쪽파와 오징어를 넣은 파전을 맛있게도 부쳐주었다.

슴슴하게 된장만 넣고 끓였지만
향기롭고 잘먹었던 아욱국 추억


내가 제대로 할머니의 텃밭에서 뜯어먹은 건 바로 아욱이었다. 할머니가 아욱을 뜯고 있길래, 시금치예요? 묻고 싶었지만 보나 마나 아닐 것 같아 그저 궁금한 표정만 지었더니 "아욱은 국 끓이면 최고지" 하셨다. 그리고 몇 번을 얻어먹었다. 다음부턴 내가 아욱잎 몇 장씩 뜯어와 된장국을 끓였다. 어차피 챙겨온 양념도 거의 없었으므로 순전히 된장만 넣고 끓인 거였는데 그렇게 향기롭고 좋았다. 공깃밥 하나 말면 술술 잘도 넘어갔다. 아직 냉동실에 아욱국 2인분이 남아있다. 오늘 저녁엔 아욱국 데워 밥 말아 먹어야지. 구름이 낮게 앉던 횡성 그 집 할머니는 잘 계실까?

/김서령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