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집권여당 후보에서 제1야당의 후보로 변신했고,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의 돌풍에 밀려 '대세론'도 흔들리는 상황이지만 당 안팎의 도전과 시련을 극복하며 97년의 좌절을 딛고 대선 도전의 스타트라인에 다시 선 것이다.
97년 대선후 당 명예총재로 정치일선에서 한발짝 물러나 있던 그는 98년 8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제1야당 총재로 전면에 복귀했고, 2000년 5월 전대에서 김덕룡 후보 등의 도전을 물리치고 연임돼 당 총재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특히 4·13 총선을 앞두고 김윤환, 이기택, 신상우 전의원 등 당내 계파 수장 및 중진들을 과감히 물갈이해 '대학살'이라는 평가속에 당 장악력을 한층 높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북풍', '세풍', '안풍' 등으로 정치생명을 위협받기도 했지만 강력한 장외투쟁이나 재판을 통한 정공법으로 대처하며 위기를 벗어났다.
이후 총선승리와 재보선 승리를 계기로 유력한 대선후보로 자리잡는 한편 여권의 각종 실정과 부정부패 등에 힘입어 '이회창 대세론'을 공고히 하는 듯 했다.
하지만 연초부터 민주당의 국민경선제 도입으로 시작된 정치권의 변화바람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박근혜 의원의 탈당과 '빌라 게이트' 등으로 인한 지지도 추락으로 모진 시련을 겪기도 했다.
이같은 어려운 사정을 감안한 듯 이 후보는 최근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선조대왕에게 장계를 올리면서 했던 '상유십이 순신불사(尙有十二 舜臣不死:아직도 제게 열두척의 배가 있고, 저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란 고사성어를 애용하면서 “동지 여러분이 저와 같이 있는 한, 제가 죽지 않는 한, 우리는 반드시 정권교체를 이뤄 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경기고 졸업후 서울법대 4학년때 고시 사법과에 합격한후 25세의 나이로 인천지법 판사로 임관된 이 후보의 30여년 법조인생은 '소신판결'과 '소수의견'으로 화제를 달고 다녔다.
서슬퍼런 5공시절 대법원 판사를 하면서 정권의 비위를 거스르는 '소수의견'을 자주 내다가 재임용에서 탈락했고, 6공때인 1988년 7월 대법관으로 다시 기용되기도했다.
그러나 5·16 직후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형판결'과 권위주의 정권시절의 '고속승진'을 지적하는 비판적 시각도 제기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한 측근은 “5·16직후 당시 혁명재판소에 말석으로 차출돼 참여했지만 조용수 사건에 대해선 양형을 놓고 군출신 판사들과 많이 싸웠으며 다만 법률상 합의의 비밀을 지키게 돼 있어 이를 말하지 않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이회창'이란 이름 석자가 정치권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89년 중앙선관위원장을 맡으면서부터.
당시 동해 재선거와 영등포을 재선거때 여야의 불법선거가 극성을 부리자 후보전원을 고발하고, 여야 총재인 '1노(盧) 3김(金)'에게 경고서한을 보내며 '투쟁'하다 그래도 안되자 89년 10월 사표를 던졌다.
이어 문민정부 출범후 93년 감사원장에 임명된 후 성역이던 율곡비리와 청와대비서실 등에 대한 감사를 통해 소신과 원칙주의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했고, 93년 12월 국무총리에 임명된 후에도 '얼굴마담' 총리를 거부하다 127일만에 사표를 던졌다.
이같은 이미지는 정계에 입문해 6년이란 짧은 기간에 유력한 대선 후보로 2번째 도전에 나서는 데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반면 이런 정치적 성격은 “대화와 타협을 생명으로 하는 정치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도 동시에 받고 있다.
국무총리를 끝으로 야인으로 돌아갔던 이 후보는 김영삼 대통령 당시 4·11총선 승리를 위해 영입하면서 96년 2월 정계라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내딛는다.
그는 정계입문 후 “독불장군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당시 김대통령의 경고에 맞서 “비민주적 정당에는 미래가 없다”고 '1인 보스정치'에 정면으로 저항한 끝에 결국 정계입문 1년11개월만에 제1당 대선후보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두 아들 병역문제 등으로 인해 다른 어느 후보보다도 혹독한 '정치적 검증'을 받으면서 타격을 입었고, 이후 이인제 후보의 탈당과 비주류의 흔들리기에 시달리다 97년 대선에서 패하고 말았다.
이 후보는 97년 12월 20일 대선 패배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좌절하지 않고 시대적 소임을 다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다시 대선후보가 됨으로써 그 다짐의 절반을 실현한 그가 12월 대선에서 나머지 절반의 다짐도 실현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