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당 진념 후보
진념 후보는 경제통이다.
그가 경제통으로 클 수 있었던 것은 1962년 행정고시(14회)에 합격한 뒤 첫 발령지가 경제기획원이었고 이후 물가총괄, 자금계획, 종합기획과장 등을 거쳐 경제기획관, 물가정책국장, 경제기획원 차관보, 경제기획원 차관에 이르기까지 '경제부처에서 잔뼈가 굵은 경제전문가'로 성장해 왔다.
과거 경제개발계획을 주도했던 경제기획원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똑똑한 인재를 중용해 왔다.
대표적인 호남 엘리트군인 그가 영남 정권시절 경제기획원에서 근무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그는 노태우 대통령 시절인 1991년 동력자원부 장관으로 처음 장관직에 오른 뒤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1995년 노동부 장관,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현 정부에서 1998년 기획예산위원회 위원장, 1999년 기획예산처 장관, 2000년 재경부 장관, 2001년 경제총수인 부총리 자리에 오른다.
세개 정권에서 부총리를 포함, 모두 여섯번의 장관을 지내게 된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직업이 장관인 사람'이다.
호남 출신인 그가 현 정부를 제외한 영남 정권에서 이처럼 경제수장으로 중용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누구에게나 친화력이 있고 지방색이 덜한 인물인 데다 그를 중용해 주었던 '스승'이 모두 영남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날 키워준 분은 김학열(1969~1972년 재직·경남 고성) 전 부총리다. 그분은 나를 사무관 시절부터 채찍질하면서 키웠다. 그 다음 서석준(경북 성주) 전 부총리가 중용해 줬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독특한 행정철학이 있다. 부하직원들에게 무조건 강요하기보다는 함께 논의하자고 한다. 즉, 업무에서 부하직원들을 주체로 끌어들이게 되면 스스로가 그 일을 해낸다는 게 그의 행정철학이다.
다른 경제부처와 정책조율을 할 때도 한 발짝 물러서는 그의 태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다.
그는 “경제행정을 오래 하다보니, 리더 몇 사람이 개혁적인 정신을 갖고 있다고 뛰어다녀 봐야 개혁이 되는 게 아니란 걸 터득했다”고 말한다.
이 때문인지 항간에는 그에 대해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사람이다. 결정하는 일이 없다. 개혁적 성향이 부족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대해 그는 “경제문제에 관한 한 나는 시장론자이며, 시스템 개혁론자”라고 일축한다. 그렇다고 시장에 무조건 맡기자는 것은 결코 아니며, 시장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견해다.
대표적인 예가 부실기업으로 꼽히는 하이닉스반도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는 '회사채 신속 인수제'라는 희대의 비방을 마련했다. 그는 이것을 시스템 개혁과 연결을 짓는다. 시스템이 완전히 실패한 상황에서 하나만 무너지면 도미노식으로 연쇄 도산하게 되는데, 정부가 팔짱을 끼고 있을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IMF 직후 기아그룹 회장을 맡던 시절, 은행문이 닫혀 신용장조차 개설할 수 없었다. 시장이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 정부는 직접 개입해 시장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하이닉스 사태 초기 정부 조치도 옳은 것들이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그는 사람 챙기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다. 지난 1월에는 역대 재경부 장관인 이규성, 강봉균, 이헌재씨 등과 함께 골프회동을 가졌다. 물론 이날 모임은 그의 제의로 성사됐다. 역대 재경부 장관들이 골프장에서 함께한 것은 처음이다. 재경부 관계자들은 “진 전 부총리는 옛날에 인연이 있던 사람들을 잊지 않고 잘 챙긴다는 평판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이 때문인지 그에게도 수차례 정치권의 손길이 찾아왔다.
동력자원부 장관을 맡던 1990년대 초, 미국의 스탠포드대학에 머물던 1993년, 노동부 장관을 하던 1996년, 2000년 4·13 총선 등 네 차례에 걸쳐 출마를 권유받았고 한때 출마준비까지 했지만 모두 물거품이 됐다.
그러던중 중앙의 거시적 경제를 맡아왔던 그에게 실천적 경제론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6·13 지방선거에서 경기지사로 나선 것이다.
◆ 한나라 손학규 후보
서강대 교수로 재직중이던 손학규 후보는 93년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청와대 당시 교육사회문화수석인 김정남 수석으로부터 김영삼 대통령(YS)의 호출 메시지를 받는다. YS를 면담한 뒤 '대통령이 불렀다, 개혁 위해 나섰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광명보궐선거에 나서는 계기이다.
그는 마지막 수업시간에 “내가 무엇이 되는지를 보지 말고,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를 지켜봐 달라”며 제자들을 위로했다. 이 말은 그의 정치생활을 이끄는 좌우명이 되었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손학규는 초선의원 때부터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쳐서 이미 전국적인 인물로 성장하였다. 각 언론매체와 각급 시민단체, 정부부처로부터 '실력있는 의원'이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특히 상임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여당의원임에도 금융실명제 대체입법을 주장하고, 1994년 건설위원회에서는 정부의 주택정책을 비판하면서 종합적인 신도시개발정책을
[여야 도지사후보 탐구] 입신양명
입력 2002-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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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07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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