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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 칼럼니스트·(사)다산연구소 기획위원단
한국은 이야기의 나라이다. 삼천리 방방곡곡 스토리가 넘친다. 문화방송이 1965년 5월1일 방송한 '전설 따라 삼천리'는 라디오 최장수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중간에 폐지됐다가 부활해 1983년까지 4천408회나 이어진 것은 각지의 풍부한 '스토리 콘텐츠'가 밑받침이겠다.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받고, '오징어 게임' 등 K콘텐츠가 넷플릭스를 점령한 저력의 연원이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수많은 스토리가 반만년을 이어오면서 민족문화의 원형으로 각인되지 않았나. 그 형질은 기록과 구전(口傳), 그리고 지명(地名)에 담겨 있다.

특히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경기도는 스토리의 마르지 않는 샘이다. 곳곳의 지명에 역사와 민족의 혼이 스며 있다. 예컨대 이천(利川)의 경우 고려 태조 왕건 설화가 깃들어 있다. 원래 이름은 남천. 후백제와 자웅을 결하기 위해 남진하다 남천의 복하천의 홍수로 발이 묶였다. 이때 호족 서목이 얕은 곳으로 물길을 인도해 무사히 건넜다고 한다. 왕건은 삼국통일 후 남천에 이천이란 이름을 내렸다. 이천은 이섭대천(利涉大川)이란 주역의 뜻풀이에서 따왔다.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롭다'는 뜻이다. 로마시대 시저가 루비콘강을 건너는 상황을 연상하면 된다.


임진왜란 당시 지네가 독 뿜어
왜병 물리친 화성 지네산 설화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고초동을 보자. 조선 병자호란 때 삼학사 중 하나인 오달제가 태어나자 일대 나무와 풀이 말라죽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여겼는데, 결국 청나라에 항복하기를 거부해 심양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그의 기개와 지조를 기려 마를 고(枯)에 풀 초(草) 고초골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설화이다. 그는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렬'이란 시호를 받았다. 묘소는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에 있다. 묘소에는 시신이 없고 그가 차고 있던 혁대와 주머니가 묻혀 있다. 그래서 묘비 대신 대낭장비(帶囊藏碑)가 서있다. '역사적 올바름'을 떠나 중국과 신경전이 뜨거운 작금에 '역사적 가르침'을 되새길 스토리텔링 아니겠나.

이뿐이겠나. 지명에는 기려야 할,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장면이 스며 있다. 경기도 화성시 지네산은 임진왜란 당시 지네가 독을 안개처럼 뿜어 왜병을 물리쳤다는 설화가 있다. 안성 원곡면과 양성면 사이 만세고개는 1919년 4월1일 2천여 농민이 기관을 불태우고 비록 이틀간이지만 해방을 맛본 거사를 새기고 있고.

경기도 곳곳 지명 스토리의 샘
행정구역 팽창·분할따라 변할
지명의 고유성 훼손 안됐으면


문제는 지명도 생로병사를 겪는다는 거다. 경기도는 예부터 행정구역의 이합집산이 요란했다. 고려시대 1018년 지명이 시작된 양주(楊州)의 경우 의정부 동두천 남양주 구리와 서울의 노원 도봉 중랑 광진구에 고양 일대까지 포괄하는 거대한 지역이었다. 광주는 성남 하남과 서울 강남지역에 걸쳤다. 고려시대 양광도는 경기도와 충청남북을 아우르는 행정구역인데, 바로 양주와 광주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이러한 양주와 광주는 분할과 통합을 지속하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경기도는 지금도 꿈틀거린다. 인구 100만이 넘는 시가 수원과 고양 용인 세 곳이다. 특히 용인은 2001년만 해도 38만6천명으로 경기도내 인구 서열 7위였다. 지금은 인구 107만명의 특례시로 성장했다. 화성은 2001년 시 승격 때만 해도 인구 19만1천명 소도시였다. 지금은 성남시를 앞지르며 서열 4위로 성장했다. 올 연말 100만명이 넘는 메가시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바야흐로 '용-화 전성시대'이다.
 

행정구역의 팽창과 분할에 지명의 변화가 뒤따른다. 자연스레 본디 스토리는 잊힌다. 예컨대 파주의 법원리에 법원은 없다. 법의리와 원기리를 합치면서 앞글자 하나씩 땄다. 올바른 행동을 본받는다는 법의(法儀) 이야기는 잊혔다. 신도시는 더 심하다. 분당은 분점리와 당우리의 앞글자이다. 여기에 동이를 팔던 장터 이야기는 없다. 일산도 일제가 한뫼를 '하나의 산'으로 잘못 해석한 결과이다. '큰 산'이란 뜻이라면 고봉(高峯)이 맞지 않겠나.

앞으로 용인, 화성도 행정구역 이합집산과 함께 새로운 지명이 등장할 것이다. 이때 지명이 지닌 콘텐츠를 훼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행정편의주의적 작명에 우리 고유의 스토리텔링이 말문 막히면 되겠는가.

/박종권 칼럼니스트·(사)다산연구소 기획위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