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읽어준 '하늘을 나는 교실'
10년전 쓴 '개그맨' 같은 구절 놀라
이 장면에서 왜 놀랐냐면 10년 전에 쓴 내 단편 '개그맨'에 이런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문득 그가 들려준 이야기. 우리가 보고 있는 별이 오래전에 죽은 별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영원한 것은 별이나 그걸 바라보는 우리가 아닌 빛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죽은 별이 내고 있는 빛이 여전히 우주를 가로지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과학책에서 읽을 줄 알았는데, 시작은 어린 시절에 읽은 책이었다. 이어진 내 소설에서는 죽은 연인이 주인공에게 엽서를 쓰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가 죽었다는 것도, 내가 서른아홉이라는 것도 믿기지 않는 지금, 실감 나는 것이라고는 트레일러를 달구는 저 빛들뿐. 내 피부, 내 입술, 혀와 점막과 늑골 속으로 들어온 빛이 심장을 톡톡 두드린다. 내가 두근거리기 시작한 것은 5년 전 그가 내 이름을 종이에 새겨 넣은 바로 그 순간부터일 것이다'. 그 문장을 썼을 때 나는 서른아홉이 되려면 한참 남아있었다. 마흔 아홉이 다 되어가는 지금, 두 책을 잇는 선분이 낮에 뜬 별자리처럼 심장을 톡톡 두드린다.
나는 별과 빛에 관한 이야기가 어린 시절에 읽은 책에서 시작된 줄을 모르고, 서른이 넘어 작가가 된 다음에야 그 이미지에서 비롯된 문장을 썼다. 이 책도, 마르틴도 완전히 잊어버렸는데도 별과 빛에 관한 이미지는 내 기억 속 어딘가에 발효되어 있다가 문득 어느 인물의 입술을 빌려 나온 것이다. 책에 대한 기억을 다 잊어버린 후에도-즉 별이 죽어버린 후에도-빛은 우주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신비로움을 간직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별이 사라진 이후의 빛 같은 것이 아닐까.
'책벌레' 내 인생 행복하게 여겨져
평생 풀 수 없는 망각속 선물상자
도미노가 건드리면 저절로 풀릴 것
그러다 망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았다. 망각이 있어야 기억이 되살아나는 찰나가 가능하니까. 번쩍이는 여름 번개처럼 문득 깨닫고 기쁨으로 가득 차는 순간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데 이 기쁨은 망각이 없고서는 불가능하다. 망각이 밤과 어둠을 만들지 않았다면 기억이 살아나는 빛도 없을 테니까. 이토록 커다란 발견의 기쁨은 기억과 망각이 함께 손잡고 데려가는 언덕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다 또 깨닫는다. 내 안에 얼마나 많은 책 속의 이미지들이 무의식 속에 잠겨 있을까? 한 번의 일은 수백 번의 일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장기저장된 내 무의식 속에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풀지 못할 선물상자가 가득할 것이다. 중년의 인간은 우울해지기 쉽다. 성취에 대한 평가가 청구서처럼 몰려들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오래전에 읽은 책의 스쳐가는 별빛의 시작점을 떠올린 순간에, 나는 책벌레로 살아온 내 인생이 참으로 행복하게 여겨졌다. 평생 풀 수도 없는 선물상자가 망각 속에 들어있으며, 어느 우연의 도미노가 건드려지면 저절로 풀려날 테니까.
/김성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