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901001147100053982

김서령_-_에세이필진.jpg
김서령 소설가
이제 한국식 나이 셈법은 사라졌다. 내 또래 친구들은 신이 났다. 원래 나이에서 한 살 빼고 두 살 빼고, 도로 어려졌다. 하지만 우리 집 꼬맹이는 잔뜩 뿔이 났다. 작년, 만 나이 법이 곧 시행된다는 뉴스가 떴을 때 나는 여덟 살 딸아이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너 이제 내년 되면 도로 일곱 살 된다? 아홉 살 아니고?"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상황을 설명해줬더니 아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떼를 썼다. "싫어! 내가 얼마나 힘들게 아홉 살이 되는 건데!" 웃음이 났다. 아니, 밥 먹고 잠자는 거로만 저절로 나이를 먹었으면서 이게 무슨 소리람. 하지만 아이의 반응은 격했다. 열심히 나이 먹은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등교를 하려던 아이가 문득 멈춰 섰다. 심각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엄마, 그러면 나 내년에 2학년 못 되고 유치원 도로 가야 하는 거야?" 고민은 또 있었다. "엄마, 설마… 키가 다시 작아지는 건 아니지?" 알고 보니 우리 집 아이만 그런 건 아니었다. 꼬맹이들 키우는 집들마다 아이들의 한탄에 웃음보가 터졌다.

딸아이의 두 번째 일곱 살이 이제 시작되었다. 뙤약볕 비추는 날에 새 나이를 갖는 건 꽤 멋지다. "두 번째 일곱 살이야. 지난 일곱 살에 못 했던 일, 아쉬웠던 일, 다시 해봐." 내 말에 아이가 코웃음을 흥, 친다. "난 아직도 마음이 안 풀렸거든! 일곱 살 된 거 속상하거든!" 푸푸 웃으며 등교시킨 후 나도 출근을 했다.

이제 사라진 한국식 나이 셈법
여덟살 딸, 도로 일곱살에 심각


내게도 두 번째 일곱 살이 왔으면 좋겠다. 나의 일곱 살은 언제나 마룻바닥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방 세 개짜리 단독주택이었으나 우리 다섯 식구에게 주어진 방은 한 개뿐이었다. 방 한 개는 작은 부엌을 덧대 신혼부부에게 세를 주었고, 나머지 한 개는 총각 아저씨에게 세를 주었다. 딸기와 포도나무가 있던 작은 마당 닭장에는 신혼부부가 겁도 없이 들여놓은 칠면조 두 마리가 있었고, 엄마는 옥상 장독대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 수돗가에서 빨랫비누를 굴려가며 손빨래를 했다. 스테인리스 동그란 대야 옆에 놓여 있던 초록색 푸로틴 샴푸 통이 여태 기억나는 걸 보면 내 기억 속 그 집은 참 평화로웠나 보다. 나는 마루 문을 활짝 열어둔 채 마룻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었다. 소심해서 친구가 없었다기보다 나는 새침데기여서 친구가 없었다. 유치하게 흙장난이나 하는 동네 또래들이 한심해서 나는 마루에 엎드려 책 보는 걸 택했다. 그렇다고 심심하지 않은 건 아니어서 나는 온종일 마당을 쳐다보았다. 화단 가득 색색깔로 핀 채송화 보는 맛이 가장 좋았는데 통통한 채송화 잎은 하도 귀여워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났다. 턱이 높은 계단을 일고여덟 개쯤 오르면 조막만 한 옥상에 장독대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지만 나는 장독대 뚜껑 열어보는 일이 그렇게 재미났다. 어느 뚜껑을 열면 고린내 풍기는 된장이 있고 어느 뚜껑을 열면 붉은 고추 몇 개가 동동 뜬 간장이 있었다. 짜다는 걸 알면서도 손가락 끝에 콕 찍어 먹어보는 알량알량한 재미. 칠면조 근처에는 무서워서 다가가지도 못했지만 몇 알 되지 않는 딸기를 따고 새끼손톱보다 더 작은 새파란 포도알도 넘봤다. 남쪽 소도시에 살았지만 강원도 토박이인 부모님 입맛을 따라 배웠기 때문에 일곱 살 나는 생새우를 잘도 까먹는 아이였다. 다른 집 아이들이 옥수수를 쪄먹을 때 나는 강냉이밥을 먹을 줄 알았고 다른 집 아이들이 호빵을 먹을 때 나는 삶은 골뱅이를 먹었다. 그 식성은 여태 유효하다.

나의 일곱살때 기억 새록새록
'다시 돌아간다면…' 많은 상상
그때처럼 비는 지루하고 상쾌

다시 일곱 살이 된다면 나는 도서관이 있는 동네로 이사를 가자고 부모님을 있는 대로 조를 것이다. 읽을거리가 더는 없어 샴푸 통과 치약에 쓰인 주의사항까지 읽고, 신문이라도 읽고 싶어 한자를 일찍 배웠다. 그땐 한자를 모르고는 신문을 읽어낼 수 없었으니까. 마을 도서관이 있었더라면 일곱 살의 나, 얼마나 좋았을까. 처음의 일곱 살과 다르지 않게 햇살 잘 드는 마룻바닥을 뒹굴겠지만 옆에는 늘 아직 읽지 않은 것들이 산처럼 쌓여있겠지. 그런 일이 일어날 리 만무하지만 두 번째 일곱 살을 혼자 생각하며 바깥 비 내리는 풍경을 본다. 일곱 살의 그때처럼 비는 약간 지루하고 약간 상쾌하다.

/김서령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