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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황영환 선생 생전 모습. /황영환 선생 유족 제공.

한평생 노동 운동에 매진해온 황영환(사진) 선생이 지난 2일 향년 87세로 별세했다.

1937년 강화 교동 출생인 고인은 1961년 인천산업전도위원회(현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설립 초기부터 활동하며 노동 운동에 발을 들였다.

고인은 노동자 인권 교육의 중요성 등을 강조했던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설립자인 조지 오글 목사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고인은 1962년 한국베아링(주) 부평공장에 취업했다 1971년 해고된 뒤 인천 해고노동자 중 처음으로 7년간 해고 무효를 위한 법정 투쟁을 벌였다.

고인은 1979년부터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 노동상담역을 맡으며 인천 등 전국에서 노동자를 만났다.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과도 함께했다.

인천 동구 만석동에 있었던 동일방직은 국내 최초의 여성 노조 지부장이 탄생한 곳으로, 회사 측이 여성 노동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오물을 던진 이른바 '동일방직 똥물 사건'으로 잘 알려졌다. 그는 동일방직 사건 등의 배후로 지목돼 옥살이하기도 했다.

출소 후에도 고인은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노동사무소장, 회현교회 운수노동자 상담소장 등을 맡았다. 그러다 2005년 갑작스레 뇌출혈로 쓰러진 그는 작은 농장을 운영하다 지난 2일 노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1961년 인천도시산업교회 활동
동일방직 사건 배후 지목 옥살이

노동 운동에 앞장선 고인의 삶은 인천민주화운동센터가 2021년 발간한 구술집 '내가 살아온 이야기'에도 담겼다.

박남수 '영원한 노동자 고(故) 황영환 추모위원회' 위원장은 3일 빈소에서 가진 경인일보 인터뷰에서 "고인은 어려운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함께 술잔을 나누던 동료이자 노동자였다"며 "고인을 비롯한 노동 운동 1세대들이 앞장서기 전까지 한국의 노동 운동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고인은 체계적인 민주 노동 운동의 기틀을 닦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고인 빈소는 부평세림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4일 오전 7시30분에 진행되며, 장지는 경기 남양주시 마석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이다.

/변민철기자 bmc0502@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