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도성과 먼 영월서 생 마감
조선 왕릉 중 가장 초라한 '장릉'
부인 정순왕후는 남양주 사릉에
566년 죽어서도 만나지 못한 인연
추모제도 따로… 이젠 합장하길

566년 전 어린 왕과 왕비가 마지막 밤을 보낸 후 비 오듯 눈물을 흘렸던 청룡사 우화루(雨花樓)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청계천 다리에서 어린 부부는 무슨 말을 했을까? 권력은 비정하다. 모든 것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운명의 순간이 도성 밖에서 벌어졌다. 영도교는 청계천에 흐르는 물처럼 아무 말이 없다. 둘은 영도교에서 살아 영영이별, 죽어 영영이별하여 만날 수 없었다.

조선 왕 중 최초로 궁에서 태어난 왕자, 세종의 적장손이요, 문종의 적장자 이홍위는 모두의 웃음 속에 행복한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할머니 소헌왕후의 죽음과 연이은 세종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 문종의 쇠약한 몸으로 인해 궁 안에 웃음이 사라진다. 어머니 현덕왕후는 왕자를 난 후 산후병으로 죽는다. 아버지 문종마저 어린 아들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난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스러지고, 천하에 사고무친 고아가 된 단종은 12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과연 왕이 되고 싶었을까?
숙부인 수양대군은 왕을 그냥 두지 않았다. 아버지 세종의 바람과 다르게 어린 조카를 역사 속 희생양으로 만든다. 어린 왕과 왕비는 그렇게 숨죽이며 궁에서 2년6개월을 살았다. 단종은 조선 왕 중 신분이 가장 많이 바뀐다. 세자에서 왕으로 왕에서 상왕으로 그리고 노산군에서 마지막 서인으로 18년 짧은 삶을 마감한다. 부인도 그렇다. 1살 위 소녀는 왕비에서 왕대비로 그리고 군부인에서 서인으로 마침내 비구니로 살며 단종보다 64년을 버텼다.

노산군은 머나먼 영월, 3면이 강이요 뒷산이 절벽인 영월 청령포에서 다시는 나올 수 없었다. 소식도 전할 수 없는 천혜의 유배지에서 말없이 외롭게 있었다. 청령포에 유일한 벗은 소나무 한 그루 관음송이다. 단종은 관음송을 껴안고 속삭였다. 어린 정순왕후도 매일 도성 밖 동망봉에 올라 해 뜨는 영월에 절했다.
정순왕후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통곡하며 영월을 향해 안녕과 명복을 빌었다. 64년을 만날 수 없는 님에게 절하며 말했다. 살아서 왕에게, 죽어서 능에 기원하였다. 슬픈 왕과 왕비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노산군은 죽은 후 241년 뒤 숙종 대 신원이 회복되어 묘호가 단종이 되었다. 능호는 장릉(莊陵)으로 영월에 있다. 조선 왕릉 중 가장 먼 곳에, 가장 초라한 규모로 홀로 있다.

치욕을 참고 정순왕후는 도성 밖 동망봉에서 살았다. 도성 밖 자지우물이 있는 자지동천에서 저고리 깃과 댕기에 자줏빛 염색을 해 팔며 자줏골에서 살았다. 이후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 아들 집에서 81세에 죽었다. 그녀는 해주 정씨 선산에 묻혔다. 남양주 진건에 있는 사릉(思陵)이다. 조선 왕 중 두 번째로 단명한 단종과는 달리 조선 왕비 중 두 번째로 장수한 왕비가 정순왕후다. 얼마나 애태우고 생각을 많이 했으면 사릉일까.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그들은 만날 수 없다. 왕과 왕비로 살아간 날보다 서인으로 살아간 날이 더 많았던 두 사람이다.

이제 우리가 만나게 해 주어야 한다. 566년 동안 살아서도 죽어서도 만날 수 없다면 누구의 잘못일까? 영월에서 단종문화제와 종로에서 정순왕후 추모제를 따로 진행하고 있다. 정말 안타깝다.
청년 단종과 약속을 지키러 정순왕후가 있는 남양주 사릉으로 나섰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왕릉을 걸으며 홀로 약속한다. 영월 청령포 관음송 위 햇빛이 남양주 진건 소나무에 비친다. 이제 한양도성에서 가까운 남양주 사릉에 단종의 장릉과 합장하면 좋겠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무더위 속 사릉에 시원한 솔바람이 분다.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