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모한 '우리가치 인문동행'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인문공동체 책고집 이름으로 전국의 노숙인 시설에서 동시에 인문학 강좌를 진행하는 원대한 프로젝트다. 2005년 국내 최초로 노숙인 인문학 강좌(성프란시스대학)가 출범한 이래 전국에서 동시에 강좌를 개설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노숙인 인문학의 출범은 노숙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했을 뿐만 아니라 인문학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졌다. 이후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이 뒤를 이었다. 거기까지였다. 미디어라는 새로운 날개를 단 인문학은 나날이 보폭을 넓혔지만, 정작 그의 마중물 역할을 했던 노숙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이내 사그라들고 말았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을 거치며 사회적 관심권에서 더욱 멀어진 노숙인들은 거리에서, 쪽방에서, 야산에서 비참한 삶을 겨우겨우 이어가고 있다. 수도권을 넘어 지역의 노숙인 수가 늘고, 20대와 30대 젊은 노숙인의 수가 증가했고, 여성 노숙인은 여전히 거리에서 방치되고 있는 현실이다.
'노숙인 인문학' 초기 기획 안일
대학서 강좌 중단시키는 등 낭패
노숙인 인문학의 전국화를 시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노숙인 인문학은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는 대신 진행 과정에서의 유대와 공감을 지향한다. 실의에 빠진 노숙인에게 다가가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그리하여 모두가 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할 이유를 공유하고, 사람다운 삶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을 함께 나눈다.
강좌를 기획하면서 전국의 노숙인 시설 사람들과 다층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덕분에 알게 된 것들이 있다. 그동안 여러 지역에서 강좌가 진행돼왔다. 무리 없이 운영되는 곳도 있지만, 충분한 연구 없이 뛰어들었다가 낭패를 본 사례도 있다. 지역의 대학에서 강좌를 개설해 놓고는 느닷없이 중단시킨 사례도 있다. 지식인들의 자기 만족적 활동에 애먼 노숙인을 동원한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대학에서는 해볼 만한 사업이다. 대학 이미지를 제고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정부지원금 혹은 공모사업비를 따낼 기회일 수 있다. 노숙인 시설의 입장은 다르다. 누군가 인문학을 해보자는 제안이 오면 일단 망설인다. 솔직히 썩 내키지 않는 일이다. 준비 안 된 프로그램에 시설 이용자들을 동원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책고집 또한 초기 기획 단계에선 안일하게 접근했다. 우리가 예산 만들었으니 시설에 인문학 강좌 진행하자고 하면 무조건 좋아할 걸로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얼핏 달콤하게 들릴 수 있을진 모르지만, 그동안의 실패와 실망을 경험한 시설의 종사자들에게 그다지 내키는 사업이 아닌 것이었다.
원점서 출발… 충분한 대상 이해
시설 종사자와 면밀하게 협의해
다시 상처주지 않도록 준비해야
원점에서 다시 출발한다.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 시설 종사자들과 면밀하게 협의해야 한다. 노숙인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지식 자랑이나 하는 껍데기 강좌여선 안 된다. 따라오라고 할 것이 아니라 시설이 직접 기획에 참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주체라는 인식이 있을 때 동기부여는 물론 참여 의지가 커진다.
사의재의 사의(四宜)는 '반드시 해야 하는 4가지 일'이라는 뜻이다. 생각이 담백하고, 용모가 엄숙하고, 말수가 적고, 행동을 진중하게 하는 것이 다산이 생각한 사의다. 노숙인 인문학의 사의는 '겸손함과 철저한 준비, 대상에 대한 이해, 시설과의 면밀한 협력'이다. 기왕의 상처가 큰 분들이다. 최소한 다시 상처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
/최준영 인문독서공동체 책고집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