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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우 작가
경제성장을 쉽게 풀이하면 준수한 일자리가 늘어나 더 많은 소득으로 더 풍족한 소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국가들은 편차는 있으나 최대한 많은 여성이 출산이란 장애물을 넘어 준수한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사회구조를 만듦으로써 현재의 풍요를 이룩했다. 이는 곧 여성 또한 가정의 주수입원이 된 덕분에 남성이 부양 책임을 떠안지 않으면서도 가족을 형성하고 더 나은 삶을 누리게 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출산에 따른 차별이나 불이익을 최소화시킨 성평등한 노동시장과 그에 기반한 경제성장은 여성에게도 이로웠지만 특히 평범한 수입의 남성들에게 가장 큰 이득을 선사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평등이 없는' 성평등은 이런 이점을 가져올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 먼저 '평등이 있는' 성평등이란 무엇일까? 노동시장의 측면에서 저임금의 수준이 높고 고임금의 수준은 낮아 전체 노동자의 격차가 작은 가운데, 전반적인 노동시간이 짧고 성별 취업 여부도 비슷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노동시장의 성평등은 육아 및 가사노동의 성평등과 짝을 이룬다. 이와는 반대로 '평등이 없는 성평등'은 한국이 잘 보여준다. 전체 노동자의 격차 및 가정의 성불평등이 큰 상황에서 소득이나 지위가 높은 남성의 영역에 여성이 파편적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화제가 된 현대차 '킹산직' 공채에 창사 이래 처음으로 6명의 여성이 채용된 것이라든지, '신의 직장'으로 불리는 공기업이나 대기업에 여성의 비중이 소폭 높아진다든지, 정당의 공천 할당제나 기업의 임원 할당제를 통해 여성 고위직 비중이 소폭 높아진다든지 하는 일들이다.


지금 한국은 '승자의 저주' 겪어
학사 이상 고등교육 이수자
고용 기회 OECD중 가장 적어


한국에서 유리천장이나 젠더의 벽이 깨지는 것은 그 자체로 환영할 일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평등 없는 성평등'의 조각들이다. 한국 사회가 전력투구해야 할 일은 '신의 직장'이나 '킹산직'처럼 국제적으로도 특수한 고임금 일자리에 여성의 지분을 늘리는 게 아니라 아예 이런 일자리를 없애 나가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저임금 직업군에 속하더라도 가족을 이루는 데 지장이 없는 노동시장과 가족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저임금 노동자가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아니 그들이 경제적 이유로 연애나 결혼 등을 포기하지 않아야만 그 이상 계층에서도 포기를 멈출 수 있다. 이런 사회를 만들었을 때 국가적 경제여건이 악화되어 출산율이 하락하더라도 한국과 같은 경이적인 저출산을 방지할 뿐 아니라 확연한 반등도 가능하다.

'평등 없는 성평등'이 진행 중인 오늘날의 한국은 일종의 '승자의 저주'를 겪고 있다. 예컨대 과거 한국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한 데는 크게 두 가지 가족형태가 바탕이 됐다. 하나는 노동시간이 길더라도 남성 외벌이로 부양이 가능한 가구이고 또 하나는 가정노동과 유급노동의 이중부담을 진 여성이 스스로를 갈아넣어 맞벌이를 하는 가구이다. 경제성장이 성숙될 수록 전자도 후자도 지속되기는 어렵다. 이때 선행국가들이 그러했듯 '평등 있는 성평등' 사회로의 이행에 힘을 쏟아야 했지만, 평등도 성평등도 변죽만 울리는 사이 국민소득 3만달러를 넘어버리고 말았다. 선진적인 성평등 사회를 접해보지도 않고 달성된 고도성장은 한국 사회로 하여금 '평등 있는 성평등'이 얼마나 중요한 사안인지 여전히 절감하지 못하게 한다.

'평등 있는 성평등' 사회 진입
젠더전쟁 종지부 찍을 수 있을까

한국의 최대 자체 성장동력은 인적 자원이다. 그럼에도 한국은 학사 이상 고등교육 이수자의 고용 기회가 OECD 중 가장 적다. 혁신 및 성장에 기여할 여성 인적 자원이 '평등 없는 성평등' 아래 무수히 사장되는 것이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참혹한 젠더 전쟁의 주배경도 '평등 없는 성평등'이다. 한국과 같은 사회에선 권리의식이 높아진 여성 다수가 결혼이나 출산을 최대한 미루거나 아예 직장을 택하게 되고, 홀로 부양의 부담을 소화할 수 없는 다수 남성은 연애 및 결혼시장에서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이 와중에 원래 극심했던 미소지니가 그에 상응하는 미러링을 빌미로 극한까지 악화된 게 지금의 현실이다. 과연 우리 사회는 '평등 있는 성평등' 사회로 진화함으로써 산적한 난제들을 해결하고 끔찍한 젠더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

/장제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