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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아랍인을 권총으로 사살한다. 이유는 "태양이 너무 눈 부셔서"였다. 말이 안 되는 살인의 이유를 고집해 사형 판결을 자초한다. 뫼르소는 눈부신 햇빛 만으로도 살인이 가능한 부조리한 인간의 실체를 상징한다.

백주 대로에서 묻지마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21일 서울 신림동에서 30대 조모씨가 남성 행인 4명에게 무자비하게 흉기를 휘둘렀다. 1명이 숨지고 3명은 용케 목숨을 부지했다. 4명 모두 조씨와 일면식도 없었다. 범행 직후 순순히 경찰에 체포된 조씨는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23일 영장심사 직전엔 "너무 힘들어서 범행을 저질렀다"며 "반성한다"고 했다.

'너무 힘들었다'는 범행 동기는 '눈부신 햇빛' 만큼이나 모호하고, 불행하게 만들고 싶은 대상은 누구라도 상관 없었다. 묻지마 살인 사건의 범행동기 대부분이 이처럼 부조리하다. 2021년 성남 분당에서 스토킹하던 채팅녀 살해에 실패한 한 남성은 화풀이로 처음 본 택시 기사를 살해했다. 2015년엔 한 남성이 수원역 인근 PC방에 찾아가 마구 흉기를 휘둘러 1명을 살해하고 3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정신병력이 있는 범인은 수원 시민이 자신을 해칠 것이라는 환청을 들었단다.

무의미한 범행동기로 무의미한 희생을 초래하는 묻지마 범죄는 반사회적이다. 피해자는 사건이 발생한 시간과 장소에서 범인과 마주쳤다는 우연만으로 희생당한다. 누구나 당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신림동 살인사건 현장을 기록한 CCTV 영상이 삽시간에 퍼졌다. 공포는 막연하지만 거대해졌다.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으로 개인과 개인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부활할 듯싶다.

인간 내면에 잠재한 부조리의 실체를 인정한다 해도, 사회는 공동체의 규범과 상식으로 유지된다. 수많은 뫼르소들이 공동체의 윤리에 순화되고 적응한다. 이유 없는 적개심에 불타고, 마약에 취하고, 환청에 시달리는 뫼르소들이 속출한다면, 공동체가 고장났다는 증거다. 가짜 뉴스가 진실을 왜곡하는 정치권, 선생과 학생이 권리를 다투는 학교, 근원을 알 수 없는 적개심으로 도배된 온라인 플랫폼, 공생의 구조가 붕괴된 시장경제…. 수많은 뫼르소들이 출현해도 이상하지 않은 공동체 붕괴의 시대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