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2401000951200047091

1895년 10월 일제는 명성황후를 잔혹하게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국 각지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자(국모보수·國母報讐)'는 기치(旗幟)로 의병 봉기가 들불처럼 번졌다. 청년 김구(1876~1949)도 동지들과 함께 항일운동에 나섰으나 여의치 않았다. 연합작전을 꾀하려 청나라로 가려다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우연히 마주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를 죽여 쫓기게 된다.

영화 '대장 김창수'는 '치하포 사건'으로 인해 조선의 스물한 살 애국청년이 겪은 고단한 여정을 그렸다. 재판장에서 "나는 국모의 원수를 갚았을 뿐"이라고 항변했으나, 꼭두각시 재판부는 극악한 살인·강도범으로 몰아 사형을 선고하고 인천감리서에 가뒀다. 2년 뒤 탈옥해 행방을 감췄으나 1911년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다시 인천감리서에 갇혔다. 황해도 청년 김구와 인천의 만남은 이처럼 사연이 기구하다.

'백범일지'에 인천에서 겪은 투옥, 감옥 생활, 탈옥 과정이 소상하게 기술돼 있다. 새벽녘에 도망치면서 '답동 성당'을 본 것을 두고 '천주교당 뾰족 집이 보였다'고 했다. 신포동 패션문화거리에 조성된 '김구 역사 거리'는 젊은 날 인천에서의 행적 등 평생을 조국애로 일관한 삶의 궤적을 여덟 개 이야기에 담았다.

역사 거리에 있는 김구 선생 면상(面相)이 낯설다. 안경이 벗겨진 모습이다. 본체는 사라지고 귀 쪽 테만 남았는데, 달포 전부터라고 한다. 중구청이 주변 지역 폐쇄회로(CCTV)를 분석해 보니 어린 학생의 실수였다. 호기심에 동상 안경을 만지다 부러지자 어쩔 줄 몰라 하다 슬그머니 밑에 두고 가는 모습이 찍혔다.

중구청은 고의성이 없다고 보고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원상복구가 만만치 않아 고민이다. 동상을 세운 업체에 보수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석연치 않은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동종 제작업체들도 작업 난이도가 높고, 원형복원이 쉽지 않다며 난색이다.

업계에선 투박한 검은색 계열 둥근 뿔테 안경을 '김구 안경'이라 부른다. 선생의 분신과도 같은 평생 동지다. 안경이 벗겨지면서 맞은편 성당 십자가와 언덕길이 흐릿해졌다. 이른 시일에 답답함을 풀어드려야 한다. 시민들도 안경을 쓰지 않은 선생님을 뵙기가 민망하고 송구할 것이다.

/홍정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