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용필의 어떤 노래는 그가 직접 가사를 쓰거나 곡을 입혔고, 어떤 노래는 다른 이들이 지어 건네주었다. 물론 그는 모든 노래의 최종 수행자로서 스스로를 증명하였다. 나는 조용필 노래의 기원으로 '고추잠자리'와 '못 찾겠다 꾀꼬리' 두 곡을 지목하였다. 유년 시절에 대한 선연한 기억으로 구성된 이 곡들은 그가 품어갈 예술적 지향을 일찌감치 암시해주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가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 길이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아름다움을 순간적으로 탈환해가는 아득한 꿈의 길이었다. 조용필은 바로 그 꿈의 힘으로 일인칭인 '나'와 '우리', 이인칭인 '너'와 '당신'과 '그대', 그리고 숱한 3인칭을 노래 안으로 불러들였다.
화성문화원서 출신인물 업적 평가
6월 조용필 노래 관련 강의 세차례
조용필은 1950년 3월21일 화성시 송산면 쌍정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나는 화성이 조용필의 고향이자 차범근의 고향이라고 기억했다. 요즘은 한국 근대문학 초창기를 열었던 노작 홍사용 시인을 기리는 문학관이 들어서 있고 가끔씩 그곳에 가서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읊조리기도 하지만, 여전히 내게 화성은 조용필 삶의 첫 장(章)으로 애잔하게 다가온다. 강의를 모두 마치고 찾아간 곳은 그의 모교인 송산초등학교였는데, 그는 이 학교를 졸업하고 근처에 있는 송산중학교를 다니다가 서울 경동중학교로 전학하였다.
초등학교 교정에는 '40회 졸업생 조용필'을 기념하여 팬클럽에서 심은 나무가 우뚝하였고, 그가 6년간 머물렀던 조용한 교정이 아담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옆으로는 조용필 노래비가 단정하게 들어앉아 있었는데 거기 새겨진 노래는 '꿈'이었다. 그가 직접 작사하고 작곡한 이 노래는 고향을 떠난 모든 이들의 사향가(思鄕歌)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조용필은 세상이 '나의 꿈'을 알아줄까를 노래하였다. '화려한 도시'와 '고향의 향기'의 확연한 대위법 속에서 그 향기를 듣는 그의 품이 '시인 조용필'에 단호하게 육박해간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시대는 청년들이 화려한 도시를 찾아왔지만, 춥고도 험한 그곳을 등지고 꿈 속에서나마 고향의 향기를 온몸으로 들으려 했던 그런 때였지 않은가.
그의 모교 송산초 노래비에 새겨진
'꿈' 고향 화성의 향기 작사·작곡
음악서 존재론적 정점 '가왕' 실감
강의가 이루어지는 동안 조용필은 처음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큰 파문과 다양한 문양을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가왕'이라고 그를 불러온 것이 꼭 그의 가창력이나 오랜 생명력 그리고 그것을 감싼 인기 같은 것에서만 연유하는 것이 아니었음도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그는 대중예술의 일상성과 평균성에서만 보자면 너무도 위대한 '시대의 노래꾼'이었고, 노래가 가닿을 수 있는 존재론적, 의미론적 권역을 정점에서 이룩해낸 '가왕'이었다. 철학자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말한 '음악은 고통받는 개별자들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삶이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방식'임을 온몸으로 증명한 것이다.
화성문화원 유지선 원장은 한국 시조시단의 중견 시인으로서 문화 자체의 품격과 그 확장 가능성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행정을 펴고 있다. 화성에서 태어나고 펼쳐져온 문화적 인물, 사건, 업적, 영향까지 섬세하게 살피면서 그 정당한 평가를 도모하고 있다. 그동안 경제적 발전을 꾸준히 이루어온 대도시 화성이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문화의 구심점으로도 확고하게 번창해가기를 희원해본다. 그 과정에서 조용필에 대한 연구와 대중화가 이곳 화성에서 크게 이루어지길 또한 희망해본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