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한산성은 한양도성에서 한강 건너 남동쪽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남한산성은 외적으로부터 왕을 지키려고 만든 임금 전용 행궁이다. 한양도성 밖 왕의 행궁지가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그리고 강화도성과 수원화성에 있었다.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광희문에서 왕십리 지나 살곶이다리 옆 전관원에 머문 후 한강을 건넜다. 또다시 광나루에서 송파나루 지나 남한산성으로 가는 곳은 모두 광주 땅이었다.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햇살이 좋은 곳, 아무도 없는 공간, 돌아올 수 없는 남한산성에서 47일을 버텼다. 한양도성을 버리고, 종묘·사직을 모신 후 행궁지 남한산성에서 지냈다. 아쉽지만 한겨울 추위 속 백성들은 전쟁터에 있었다. 이곳이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이다. 인조는 버티고 버텼다. '실천 불가능한 정의' 주전론을 펼치는 김상헌과 '실천 가능한 치욕' 주화론을 주장하는 최명길 사이에서 극도로 고민하며 머리를 싸맨다. 과연 방법이 있었을까? 살길은 무엇이고, 죽을 길은 무엇인가. 추운 겨울 남한산성에서 햇빛이 없는 서쪽 문을 향해 걸어 나선다. 곤룡포를 벗고, 머리를 풀어헤치며 삼전도 굴욕의 시작이 바로 남한산성이다.
병자호란 때 인조, 한강 넘어 도망
남한산성까지 가는 길 모두 광주땅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양손을 땅에 댄 후 이마가 닿을 듯 세 번 절하고, 머리를 땅에 아홉 번 조아리며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갖추었다.

슬프지만 잊을 수 없는 역사의 장소가 삼전도다. 롯데월드가 있는 석촌호수 서호 옆이다. 석촌호수 깊숙이 청 태종에게 바친 삼전도비가 있다. 한문으로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다. 앞면에 만주어와 몽골어, 뒷면에 한문으로 새겨 청 태종에게 바친 공덕비가 광주 삼전도에 있었다. 지금은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이다. 승전비도 아니고 굴욕적인 항복의 비문이다. 청나라는 조선에서 내용을 쓰도록 요구하고, 비석의 크기까지 결정하였다. 굴욕의 끝판왕이다. 결국 1639년 400여 명 군사가 동원되고, 23명 석공이 새겨 굴욕의 상징이 세워졌다. 조선 개국 후 유례가 없던 크기다. 광주에 있던 삼전도비와 비각은 경기감영에서 관리하였다. 이후 삼전도비는 땅에 묻히고, 홍수에 잠겼지만 역사의 치욕적 현장에 새로운 역사로 되새겨야 한다. 이렇듯 광주는 한강에서 남한산성까지 넓고 커다란 도시였다.
경기지역 평지에 세운 유일한 향교
1989년 하남시로 분리됐지만
두개市 전통문화·예절 교육 공유

남한산성 북문인 전승문에서 동장대 터가 보인다. 남한산과 벌봉 지나 하남시 방향 야트막한 산이 객산이다. 객산 기슭 평지에 커다란 은행나무 다섯 그루가 있다. 500년 넘은 은행나무는 광주향교의 수호신과 같다. 수나무 한 그루와 암나무 네 그루는 독특한 향 덕분에 학문을 닦는 향교의 상징이 되었다. 거북이 형상의 너른 평지에 큰 규모의 광주향교는 경기 지역에서 평지에 세운 유일한 향교다. 한강과 남한산성 사이 도시의 중심에 광주향교를 세웠다. 향교를 세울 때 광주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광주향교는 경기도 광주시가 아니라 하남시 교산동 교산 신도시 예정지다.
광주는 1973년 남한산성 남쪽 지역에 성남시, 1989년 남한산성 북쪽 지역 한강 아래 하남시로 분리되었다. 그럼에도 광주향교는 광주시와 하남시가 전통문화와 예절 교육을 함께하고 있다. '명륜(明倫)'이란 학교에서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히는 것이다. 1천여 년 전 하남은 광주의 중심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의 공간이었다. 경기와 인천 지역에서도 향교를 살려야 교육이 살아날 수 있다. 교육이 살아야 꿈나무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8월 가족과 함께 광주향교 가볼까요.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