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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연극 '새빨간 스피도'(루카스 네이스 작, 이영석 연출, 8월11~20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는 무한 경쟁에 내몰린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을 다루고 있다. 미국의 극작가가 쓴 미국 사회의 이야기이지만 한국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만큼 최근의 우리 사회는 승자 독식의 사회로 치닫고 있다.

"너하고 론, 니들이 4번, 5번이다." 네 명만 살아남는다고 감독이 말한다. 주인공 레이는 수영선수이다. 수영을 계속하려면 4등 안에 들어야 한다. 아니면 퇴출이다. 아마도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레이는 선을 넘기로 마음먹는다. 약물에 손댄다. 수영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레이이다. 퇴출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압도당했을 것이다. 이 사건, 그러니까 레이가 약물에 손댄 사건은 연극이 시작하기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다.

'새빨간 스피도' 스포츠 드라마 아냐
회사 엔론 사라졌으나 모델은 건재
지식공장 대학·건강기업된 병원


연극은 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하루 앞둔 날 시작한다. 선을 넘은 이후 레이는 승승장구해서 올림픽 국가대표 발탁을 눈앞에 두고 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사건이 터지는 법이다. 숨겼던 약물이 발견된다. 레이는 범인으로 들통나는 게 걱정이 아니다. 선발전에서 탈락이 두렵다. 약 없이 선발전을 통과할 수 없다. 이미 돌아갈 길이 없는 레이는 약을 구하기 위해 전 여자친구인 리디아를 찾아간다. 이후의 레이는 결승선을 향해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를 닮았다. 옆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린 채 전력을 다해 달리는 경주마는 무한 경쟁에 내몰린 현대인의 모습이다. 

 

파산한 이후에도 여전히 유명한 회사가 있다. 미국의 대기업 엔론이다. 엔론은 파산과 함께 엔론 모델을 남겼다. 최고의 성과를 올린 직원이 보너스를 독식하고 성과가 낮은 직원은 해고한다. '등수 매겨 내쫓기'라는 이름으로 도입된 이 모델은 '랭크 앤드 양크'(Rank and Yank), 혹은 '20/70/10 룰'로 불린다. 연말에 하위 10%를 해고하면서 그 이름, 사진, 미달의 목표를 공개해 모욕을 준다. 물론 상위 20%의 승자가 모든 걸 독식한다. 중간에 속한 70%가 가장 위태롭다. 나도 해고될 수 있다는 상시적인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며 경쟁의 무한 루프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게 된다. 이렇게 직원을 무한 경쟁에 내몬 엔론은 어떻게 되었나. 거의 모든 직원이 서류를 조작했다. 저성과자로 낙인이 찍혀 모욕을 당하며 해고되기보다는 선을 넘기로 한 것이다.

레이는 선발전에서 신기록으로 우승한다. 문제는 기자 회견을 앞둔 레이가 쓰러지고 만다. 약물 후유증으로 응급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병원에 데려다 달라는 레이의 요청을 형 피터는 묵살하고 만다. 약물 복용이 들통나면 모든 걸 망치게 된다. 다국적 기업 스피도와의 계약을 놓칠 수 없다. 피터는 비밀을 덮기 위해 혈안이다. 하지만 방치된 채 쓰러져 있는 레이를 감독이 발견한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반전이 시작된다. 레이가 먹은 건 고양이 치료제였다. 그러니까 레이는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 신기록으로 우승한 것이다. 그렇다고 병원에 데려갈 수는 없다. 모든 진실을 밝혀야 하니까. 감독과 피터는 덮기로 한다. "저는 규정을 어겼어요"라고 말하는 레이의 말을 감독은 외면한다. "경쟁이 무서웠던 거야. 경쟁에 실패할까 봐 두려웠던 거야"라며 감독은 오히려 과거의 레이를 이해하는 척한다. 다국적 기업 스피도와의 계약을 유지하고 올림픽에 나가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린 자신을 발견한 레이는 형 피터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날 물건으로 생각하나 봐." 이제 모든 게 뒤바뀌었다. 감독은 선을 넘어버렸고 형은 괴물이 되어버렸다.

성장제일주의 벗어나지 못하면
선 넘고 조작하는 사회로 움직여


연극 '새빨간 스피도'는 수영을 소재로 한 스포츠 드라마가 아니다. 회사 엔론은 사라졌으나 엔론 모델은 여전히 살아남아 그 힘을 떨치고 있다. 지식 공장이 된 대학이나 건강 기업이 된 병원의 모습은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성장제일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레이가 선을 넘는, 엔론의 직원이 서류를 조작하는 것과 같은 선택이 확산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움직이게 된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