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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
우리는 거울과 함께 생활한다. 일어나면 거울을 보고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외출하며 돌아와서 손발을 씻고 이를 닦을 때도 거울을 본다. 거울은 몸을 비출 때만 쓰는 게 아니다. 한자문화권에서 거울은 역사의 비유어이기도 하다.

'자치통감'이나 '동국통감'과 같은 역사서에도 거울 감(鑑)자를 썼다. 이 글자는 그릇의 수면을 거울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표상한 것이다. 역사의 거울을 편찬하는 데 나라마다 힘을 쏟은 것을 보면 개인은 물론 국가나 사회적 삶을 되돌아보는 거울이 필요하다는 반증이겠다.

사람들이 동물과 달리 거울을 곁에 두고 생활하는 것은, 거울을 보고 또 보는 것은 가다듬어야 할 게 많다는 것이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바르게 사는 것은 다른 일이다.

거울에 겉모습을 비추어 먼지를 털고 옷매무새야 가다듬을 수 있지만 삶의 자세를 가다듬을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 보는 거울에 비친 모습은 물리적으로도 실제도 아니다. 좌우가 뒤바뀐 좌우반전상이기에 '셀카'로 찍은 자신의 얼굴이 낯설 때도 있다. 


'거울' 국가와 사회 돌아보는 '역사의 비유'
김해자 시인, 영혼 들여다보는 글쓰기 소망


삶을 비춰주는 거울이 있을까? 염라대왕의 업경대(業鏡臺) 같은 거울 말이다. 업경대는 사람의 평생을 주마등처럼 비춰 보이고 잘잘못을 심판하는 거울이다. 그런데 그 거울은 죽어서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다.

'나'와 세상을 비추는 거울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본 사람은 고려의 문호 이규보이다. 이규보는 수필 '경설(鏡說)'에서 '흐린 거울'의 비유를 통해 세계와 나의 관계를 날카롭게 드러냈다.

이 글은 늘 안개가 낀 듯 흐린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사'와 먼지 낀 거울을 들여다보는 '거사'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는 '손님'의 대화이다. 손님은 맑은 거울이라야 거울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거사는 거울이란 겉이 흐려도 사물을 비추는 맑은 본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흐린 것은 흐린 대로 비추어 그 흐린 모습을 확인함으로써 반성하고 참모습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자 손님은 입을 다문다.

한국의 시인들은 자기와 대면하고 세상을 내다보는 은유적 장치로 유리창을 발견했다. 유리창은 광선을 투과하면서 동시에 반사하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을 유리창은 안과 밖이 소통하고 단절되는 집의 경계로, 자아를 비추는 거울로 기능하기 때문에 현대 문학, 특히 시의 특별한 소재로 부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창밖을 보며 그리움의 대상을 떠올리며 자신의 외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정지용의 '유리창1'이 대표적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임을 확인하면서 '시대(時代)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와 최초로 화해하는 내용을 담은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여진 시'도 밤비가 속살거리는 어두운 창가에서였다.

나를 온전히 비추고 타자와 하나가 되는것
치열한 극복 과정서 '자타불이' 도달 상징


문득 김해자 시인의 '종이거울'이 떠오른다. 이 시에 나타난 '종이거울'이 우리가 찾아온 '삶을 온전하게 비추는' 거울일까. 이 시는 한 무명시인의 글쓰기를 바라보며 진정한 글쓰기가 무엇인지 돌아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인은 '오늘과 어제와 그제만이 아니라, 전 생애가 비춰지는 영원의 거울'을 소망한다. 그 점에서 '종이거울'은 영혼을 들여다보는 글쓰기라는 거울인 셈이다.

시인은 다시 태어나기 위해 종이거울 속으로 들어가 나를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내가 아닌 것을 벗겨내고 벗겨냈을 때' 거울 속에 나타난 것은 내가 아닌 바로 '너'(타자)이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이름들 나무와 벌목꾼, 사슴과 사냥꾼, 산 자와 죽은 자를 '종이거울'을 통해 대면한다. 나를 온전히 비추고 모든 타자들을 비추며 타자들과 내가 하나가 되는 마당을 말하는 것이리라.

김해자 시인의 '종이거울'은 나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세계와 자신을 찾는 글쓰기이며, 그 치열한 글쓰기를 통해 '내가 너와 다르지 않은' 자타불이(自他不二), 혹은 '내가 너인' 자타일여(自他一如)를 드넓은 지평에 도달하는 것을 상징한다.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