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연한 유통마진이 있음에도 에누리라는 그들만의 용어를 따로 만들어 협력사 부담을 가중시키는 행태, 그리고 이런 행태가 유통업계의 공공연한 관행처럼 오랜 기간 계속됐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에누리가 '계약서상 명시된 합의 조건이라 법적으로 문제 될 게 없다'는 현대그린푸드의 해명은 더 놀라웠다.
자체적으로 에누리를 설계하는 대기업의 꼼수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협력사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는 구조 때문이다. 자사 제품을 대기업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게 당면과제인 협력사 처지에서 문제 제기는 곧 '계약 해지'라는 벼랑 끝으로 스스로 걸어가는 것과 다름없다. 칼자루를 쥔 '갑'과 다르게 '을'들이 눈물을 흘리며 겨자를 먹는 이유다.
그러나 토속 측은 계란을 들고 바위 앞에 섰다. 겉으론 적정 수준의 유통마진을 설정해 놓고 속으론 영세업체를 쥐어짜 수익을 극대화하는 대기업의 민낯을 과감하게 폭로했다. 법의 사각지대에서 갑질을 일삼는 대기업을 심판해 달라며 공정거래위원회에 도움의 손길도 요청했다.
하지만 그들의 간절한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왔다. 1년이 넘도록 검토 중이라는 입장만 되풀이하던 공정위가 얼마 전 내놓은 결론은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상 하도급 거래 요건을 충족하지 않아 이번 사건 심사 절차가 종료됐다는 단 한 문장에 불과했다.
대기업에 맞선 대가는 혹독했다. 계약 해지는 당연한 수순이었고, 경인일보 보도 이후 몇 달이 지나 현대그린푸드는 영업방해 등 각종 혐의를 붙여 토속 측 책임자를 형사고발했다. 공공연히 자행돼온, 누구도 문제 삼지 않던 업계의 관행을 공론화해 현대그린푸드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데 대한 사실상 괘씸죄 차원의 대응으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에는 다른 협력사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메시지도 담겨 있다. 긁어 부스럼을 낼 경우 어떤 응징이 따르는지 본보기를 남겨야 제2의 토속 사태를 원천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을 조사해 달라고 호소하던 영세업체가 거꾸로 경찰 조사를 받게 된 상황을 바라보는 나머지 협력사들의 심정이 짐작된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계란은 깨진다. 그럼에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건 바위를 깨야만 한다는 확고한 신념, 그리고 바위도 깨질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공정위의 판단은 심히 아쉬움이 남는다. 관련법상 요건을 충족하지 않는다는 한 문장 답변을 내놓는 데 1년의 시간이 필요했을까. 불공정 관행에서 비롯된 문제 제기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저 지극히 법리적인 접근을 통해 사안의 본질을 비껴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공정위가 이번 사태를 다루면서 과연 이름에 걸맞게 공정했는지 묻고 싶다.
현대그린푸드에서는 올해부터 에누리 항목이 사라졌다. 오랜 업계 관행이자 통상적인 시스템이라며, 결코 협력사에 불리하지 않은 조건이라며, 협력사와 상호 합의하에 정해온 거라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며 당위성을 주장해 놓고 왜 없앴을까.
/황성규 지역사회부(용인) 차장 homeru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