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풍이 온다던 날이었다. 폭염에 지쳤다가 비 오기 전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나는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림 모임 같은 것 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난 것이었다. 늘 그랬듯 나는 즉흥적인 사람이라 꼼꼼한 계획 같은 건 세우지도 않고 페이스북에 짧은 알림 글을 올렸다. 뭐 대단히 예술 하는 거 말고, 소소하게 그림 그리다가 사는 이야기나 조잘조잘 나누고, 두어 달 그리다 보면 완성작도 모일 거고, 그러면 조그마한 동네 갤러리 같은 데 대관해서 전시회도 해보는 거 어때요? 하고 말이다. 그림이라는 게 말이 쉽지 한 번도 안 그려본 사람투성이일 텐데 사람들이 모이겠어? 생각했지만 순식간에 여덟 명이 모였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동료 퇴사에 울적해하던 직장인 선배
외로운 부장님께 초보 그림모임 권유
이유는 할머니 됐을때 행복하려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색연필, 물감 등을 가득 펼쳐놓고 일을 벌이기엔 장소가 마땅찮았으므로 우리는 아이패드만 챙기기로 했다. 그림 선생님도 없고, 그러니까 무얼 배우려고 만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림을 그리면 좋을 것 같고, 왜인지는 모르지만 조금 행복해질 것도 같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거다. 나 같은 작가도 있고 번역가도 있고 시인도 있고 주부도 있고 선생님도, 회사원도 있다.
선배가 와아, 환호했다. "나 할래! 나도 할래! 아이패드 있지만 드라마만 봐. 이제 나도 그림 그려볼래!" 하지만 선배는 금방 말을 거두었다. "평일 낮이라는 게 말이 돼? 나 같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여기 회사원도 있다니까요. 반차 내고 나와요. 그게 뭐라고,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회사 눈치를 그렇게 봐?" 선배는 비혼이라 가족 행사 같은 것도 없어서 쓰지 않은 연차가 그득하다. 얼러봤자 회사를 혼자 지키는 부장님 마인드를 바꿀 순 없을 것 같아 나도 더 긴 말은 하지 않았다.
아마추어 수다모임 순식간에 8명 돼
삶 풍요로워질테니 노후 대책인 셈
딱 하루가 지나 선배는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반차를 내겠다고. 그래서 우리 아마추어 그림 수다 모임은 아홉 명이 되었다. 선배가 물었다. "그런 모임… 왜 만든 거야? 사람들은 그런 델 왜 가는 거야?" 나는 잠깐 생각하다 대답했다. "늙었을 때, 이다음에 할머니 되었을 때 행복하려고." 정말 그랬다. 어느 새 나는 할머니가 된 나를 상상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가 되면 일이 사라지고, 그러면 밖에 나갈 일이 줄고, 사람들 만나는 날이 적어지고, 거실 소파에 말가니 앉아 텔레비전만 보겠지. 딸아이가 집에 오는 시간만 세고 앉아서 잔소리가 늘고, 아이가 된 듯 딸에게 의지하고, 새벽잠을 깨 침대에서 오래 뒤척이겠지. 눈이 나빠져 책 읽는 일도 힘겨워질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 울적했다. 그래서 취미가 있는 삶을 꿈꾸게 되었다. 햇빛 좋은 날, 양산을 쓰고 동네 카페에 모여 앉아 그림 한 장씩 그리며 딸 흉도 보고 남편 흉도 보면서 맛있는 커피를 들이켜는 삶. 그림 실력이 도무지 늘지 않는다면 각자 얼마큼씩 내서 그림 선생님도 섭외하고, 지인들 초대해 소박한 전시회도 여는 삶. 나는 책을 만들던 할머니가 되었을 테니 친구들의 그림을 한데 모아 책을 만들 수도 있을 거야. 그렇게 사는 삶은 다정하고 풍요로울 테니까. 그러니까 이번에 만든 그림 모임은 내 노후 대책인 셈이다.
/김서령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