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렬_-_경인칼럼.jpg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객원논설위원
21세기 탈냉전의 국제관계 속에서 동아시아·태평양에서는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신냉전 구도의 먹구름이 짙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의 대중국 봉쇄 정책, 과도하게 미국과 일본에 경도되는 외교정책에 많은 우려가 따르지만 급기야 국내정치에 끼치는 영향이 과거회귀적 경향을 보이는 건 더욱 우려스럽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념적 역사인식의 일단은 각종 경축사와 발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정부 비판 세력을 의식한 듯한 광복절 경축사에서 윤 대통령은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여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분단의 현실에서 이러한 반국가세력들의 준동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시대착오적인 투쟁과 혁명, 그런 사기적 이념에 굴복하거나 휩쓸리는 것은 결코 진보가 아니고, 우리 한쪽의 날개가 될 수 없다"라고 대상을 특정하지 않았지만 야당이나 이른바 운동권 경력을 가진 정치인이나 인사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대상이 누가 됐건 국가의 수반인 대통령이 통합의 메시지보다 대결과 철지난 반공주의를 소환하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다. 특히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범도 장군 등의 흉상을 철거한다는 국방부의 방침에는 눈과 귀를 의심할 정도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사와 한국현대사를 공부해보면 좌파의 항일투쟁이 훨씬 적극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지금의 북한 정권의 존재는 당연히 없었고 우리가 대치하고 있는 북한 공산주의 정권과는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육사 교정서 옮기는건 해묵은 이념 논쟁
과거 암흑·폭력의 시대 재구성 아니라면
尹 정부의 극우 편향적 인식 바로 잡아야
극한적 퇴행 인식이 정치를 억눌러 개탄


새삼 역사논쟁이라고 할 것도 없이 홍범도 장군과 독립투쟁을 한 순국선열들을 육사 교정에서 이전한다는 것은 명분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해묵은 이념 논쟁을 야기시킬 뿐이다. 정쟁이 없어서 또 다시 정쟁을 촉발시키는건지, 역사인식의 부재와 현대사에 대한 무지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공동체의 해체와 정치의 양극화는 물론 사회 전반의 격차가 심화되는 상황을 더욱 재촉할 뿐이다. 과거 이승만 정권과 군사정권이 정권의 보위를 위해 반공주의와 냉전 이데올로기를 안보논리로 위장하여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체제 전복세력으로 몰아 국가보안법으로 매장시키고 희생시켰던 암흑과 폭력의 시대를 재구성하는 게 아니라면 윤 정부의 극우 편향적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

좌우와 보수 진보라는 이념적 의제를 둘러싼 논쟁은 얼마든지 해도 된다. 그러나 급기야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평생을 일신을 돌보지 않은 독립투사를 소련공산당 입당이라는 경력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 것이야말로 순국선열을 욕보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보편과 상식의 차원에서 봐야 한다. 모든 사안과 현상이 그러하듯이 과한 액션과 과잉 이데올로기는 승리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 때의 건국절 논쟁, 박근혜 정권 때의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 등이 모두 역사를 정치가 함부로 재단함으로써 일어났던 무의미하고 저급한 이슈 제기들이었다.

극단적 진영 정치와 저질 정치의 연원은 현대사적으로 친일과 반일 프레임, 미 군정때 청산되지 않은 친일 세력, 군사정권의 폭력적 정치, 국가보안법이라는 메커니즘을 악용한 극우 독재 세력 등의 위장 보수들, 민주화를 일궈낸 진보 세력의 도덕성 상실 등의 일탈 등이다. 서로 보수와 진보라는 말을 할 자격도 없는 세력들이 정치이기주의에 포획되어 쟁투를 일삼는 지금의 정치를 정치라고 할 수 없지만, 이도 모자라 이념 논쟁의 외관도 갖추지 못한 극한적 퇴행의 인식이 지금의 정치를 억누르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산우욕래풍만루'(山雨欲來風滿樓)는 당나라 말기의 시인 허혼(許渾)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당나라가 후기에 들어서면서 제후들의 발호와 문란한 정치, 환관의 전횡 등으로 위기에 처하면서 당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지은 시의 한 구절로서 '산에 비가 오려하니 누각에 바람이 가득하네'란 의미이다. 위기의 조짐으로서 산의 누각에 가득한 바람을 비유한 시다. 바야흐로 산에 비가 오려 하니 누각에 바람이 가득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위기의 조짐을 읽지 못하는 정치는 왜 존재하는가.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