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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의 본분은 국토방위다. 전·후방 구분 없이 전선을 이탈해선 안 되고 위수지역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예외 없는 원칙은 없다. 국가와 국민을 위협하는 대형 재난이 발생하면 현장에서 국민을 지원한다. 대민지원이다. 명령에 죽고 사는 군대의 위기 대응 능력은 민간을 압도한다. 미국은 허리케인 수해가 심각하면 군을 동원한다. 9·11테러 때는 주 방위군에 비상을 걸었다. 중국은 1976년 탕산, 2008년 쓰촨성 대지진 때 군대가 민간인 구조의 선봉에 섰다. 쓰촨성 지진 때 군인에게 구조된 3세 아이는 지난 6월 중국 대입시험에서 전국 30등 안에 들어 화제가 됐다. 일본도 대형 지진, 태풍 재난이 발생하면 자위대를 동원한다.

우리 군도 대민지원을 당연한 의무로 여겼다. 장병들이 대민지원을 학수고대했던 배고팠던 시절도 있었다. 모내기, 추수 대민지원에 동원되면 모처럼 '사제 밥'을 맛볼 수 있었고, 살벌한 영내를 벗어나는 해방감도 컸다. 그래도 대민지원의 단골 레퍼토리는 태풍, 대설 등 자연재해다. 가난한 나라에서 군은 재해를 가장 효과적이고 유능하게 수습할 조직이었고, 게다가 무상이었다.

나라가 부유해지고 어려움 없이 성장한 신세대 장병들의 인권의식이 높아지면서 명분 없는 대민지원이 도마에 올랐다. 2020년 코로나19 사태 때 현역병을 마스크 공장과 물류센터에 파견했다. 군은 대민지원이라 우겼지만, 사기업을 위한 강제노역이라는 비판이 거셌다. 지난 7월 해병대 채수근 일병 사망 사건이 대민지원에 결정타를 날렸다. 폭우 피해 현장 하천에서 실종자 수색에 나선 해병대원들은 구명조끼도 없이 전우의 손을 잡고 일렬로 급류에 투입됐다.

강원도 인제군이 최근 지역행사인 '마의태자축제'를 앞세워 인근 부대에 대민지원을 요청했다. 분개한 부대 간부가 온라인에 제보한 대민지원 내용이 가관이다. 군 간부들에게 어우동, 내시, 왕 등으로 분장한 '움직이는 포토존' 역할을 주문한 것이다. 해당 부대는 간부 50명 지원에 동의했단다. 제보 간부는 지자체가 알바생을 뽑아 맡길 일에 군 간부를 동원하는 현실에 절망한다.

내년엔 군 병장 월급이 165만원으로 오른다. 귀해진 현역병의 사기 진작책이다. 귀한 만큼 귀하게 써야 한다. 유사시 목숨 걸고 국토와 국민을 수호할 훈련에만 전념해도 몸값을 다하고도 남는다. 대민지원의 범위를 법령으로 정해야겠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