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대기업들의 영업실적을 들여다보면 심각하다. 지난달에 CEO스코어가 매출액 500대 기업 중 반기보고서를 제출한 305사의 실적을 분석한 결과 금년 상반기의 합계영업이익이 지난해 상반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주력산업인 반도체, 석유화학, 정유, 철강, 건설, 제약, 유통 등 대다수 업종이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다. 미국 등의 영향을 받은 자동차, 조선, 배터리산업이 선방했지만 전체 실적을 견인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한국 간판기업들의 성장세가 멈춘 것이다.
尹대통령 카르텔 타파 언급에 과학계 어수선
韓 장기침체 해법은 '신성장동력 확보' 불구
한국경제가 내년에도 1%대 저성장에 그칠 것이란 국제금융기관들의 전망에도 눈길이 간다. 한국의 1%대 저성장은 1998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때를 제외하면 유례가 없다. 지난달에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선진국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1.3% 정도인데 제조업 중심인 한국의 성장률 1.4%는 경제파국으로 여겨질 만큼 비관적"이라며 "이미 우리나라는 장기 저성장구조에 와 있다"고 진단했다. 일본이 앞서 겪었던 잃어버린 20년, 30년 등과 같은 장기침체의 초입에 들어선 느낌이다.
한국경제학회의 경고는 더욱 비관적이다. 학회가 국민경제자문회의의 용역을 받아 최근에 작성한 '한국경제 상장의 현황과 도전'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30년 1.68%를 기록한 후 2040년 이후에는 0%대로 쪼그라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 바통을 이어받을 차세대 주력 산업군이 부족한 터에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저출생·고령화가 겹친 때문이다.
지난달 15일 국내개봉 이후 줄곧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던 외화 '오펜하이머'가 주목된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를 이끈 이론물리학자 줄리어스 오펜하이머(1904∼1967)의 생애를 그린 것이다. 미국은 제1, 2차 대전 때 인종이나 국적을 불문하고 전 세계에서 다양한 분야의 석학들을 대거 모셔와 연구에 몰두케 한 결과 오늘날의 슈퍼파워로 변신했다. '한강의 기적'도 1960∼1970년대에 박정희정부가 해외에서 유능한 한국인 두뇌들을 파격적인 대접을 하며 모셔온 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선진국일수록 장기침체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던 엘빈 한센 하버드대 교수의 이론에 동의하기 어렵다. 자본주의경제가 성숙하면 저출산·고령화와 기술혁신 감소로 경제활동이 침체돼 성장률이 떨어진다는 것인데 요즘의 지식경제시대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근래의 미국 경제성장률이 한국보다 월등히 높은데 비결은 이노베이션(혁신)이다.
국책사업 차질 불가피 '현장소통 없어' 반발
글로벌 경쟁 속 국내 생산력만 훼손할수도
한국이 장기침체 함정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해법은 신성장 동력 확보이나 최근 국내 과학계는 벌집 쑤신 듯 어수선하다. 지난 7월28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연구카르텔 타파'를 언급한 것이 도화선이다. 정부는 내년도 국가 주요 연구개발예산을 올해보다 무려 13.9%나 축소한 21조5천억원을 배정했다. 정부가 장기과제로 추진하고 있는 각종 국책연구사업의 차질이 불가피하다. 연구자들은 현장과의 소통 없이 정부가 급조해낸 전형적인 톱다운 방식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연(緣)의 사회이다. 국내 연구개발 업계의 먹거리는 오래 전부터 최고명문대인 S대 출신들이 독식하고 있다. 대다수의 다른 대학 출신들은 밥상 근처에도 못간다. 윤 대통령의 연구카르텔 운운은 이를 지적한 것으로 판단되나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다.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이 첨예화되는데 국내 연구개발부문의 생산력만 훼손할 수도 있어 조심스럽다.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