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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업한계선 너머에서 고기를 잡았다는 이유로 어민들이 순시선에 잡혀가 몽둥이로 엉덩이를 맞던 시절이 있었다. 조업한계선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1960년대 말 얘기다. 우리 어선은 실수로, 또는 고기떼를 쫓다 조업한계선을 넘곤 했는데 순시선에 걸리면 이 같은 수모를 당해야 했다. '자국민 보호 차원'이라는 명분을 들이댄다 하더라도 현재의 인권의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던 당시 접경해역의 상황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실제로 조업한계선은 동·서해에서 북한이 우리나라 어선을 공격하고 납치하는 일이 수시로 벌어지면서 생긴 법적 기준선이다. 조업한계선은 우리 어선의 피랍예방 및 안전조업을 위해 규정한 선박출입 통제선을 말한다.

한국전쟁 후 접경해역에서는 1958년 4월 우리 어선 다복호가 북한의 경비정에 납치된 데 이어 1959년 7월에는 대창호 등 7척이 납치되는 등 북한에 의한 어선 피랍사건이 잇따랐다. 이에 북방한계선(NLL) 접근을 금지하는 방안이 필요하게 됐고 국방부의 요청에 따라 1964년 6월 농림부가 조업한계선을 설정했다. 그러나 피랍사건은 조업한계선이 그어진 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어선은 물론이고 1968년 1월에는 미 해군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 의해 나포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1967년과 1969년 두 차례에 걸쳐 조업한계선을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조업한계선은 인천 앞바다 어민들의 삶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맛있는 인천 섬 이야기'의 저자 김용구 박사는 '조기파시'로 유명했던 연평도에서 조기가 사라진 이유 중 하나로 '조업한계선'을 꼽기도 했다. 또 조업한계선이 남하하면서 많은 어민들이 백령도, 대청도 등 삶의 터전을 등져야 했다. 일부 어민들은 전남 흑산도로 이주해 홍어잡이로 생업을 이어나갔다. 당시 먹고 사는 문제에 직면한 어민들에게 몽둥이로 엉덩이 맞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어민들의 애환이 깃들어있는 조업한계선이 일부 상향 조정된다고 한다. '어선안전조업법 시행령 개정안'이 입법 예고와 국무회의 통과를 앞두고 있는데, 개정안이 통과되면 강화에 여의도 면적의 약 3배에 달하는 8.2㎢ 규모의 어장이 새로 생긴다. 어민들은 잔치라도 하자는 분위기다. 정전 70주년의 해에 들려온 소식 중 가장 기쁜 소식인 듯싶다.

/임성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