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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소설가
일주일간 대대적인 '집 안 이사'가 있었다. 원래는 딸의 방을 새로 만들어주려는 이유였는데, 그러다보니 함께 쓰던 공부방을 분리하고 남편의 취미 방을 처분하고 내 서재를 독립해나가는 식으로 일이 커졌다. 끝나고 보니 방 세 개의 모든 가구가 재배치되는, 방들끼리 이사를 다니는 고된 작업이었다. 이참에 오래된 물건도 솎아내고 묵은 먼지도 털어 내다보니 모든 것이 정리되는데 일주일이나 걸렸다.

서재에 앉아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딸이 태어난 후 십 년만에 온전한 서재를 되돌려 받게 된 셈이었으니까. 책장을 정리하면서 나만의 버릇대로 '심장' 칸을 하나 만들었다. 책장 한 가운데를 비우고, 그 안에 가장 좋아하는 '경전' 몇 권을 가져다 놓는 것이다. 거실 벽을 책장으로 채울 때 만들어본 방법인데 이렇게 한복판을 비워두고 평생 읽을 보물 같은 책들을 채우면 책장 전체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느껴진다. 자동차로 치면 엔진룸에 해당한다고 할까? 거실의 심장 칸에는 '돈키호테'와 '모비딕', '보르헤스 단편집'과 '빌러비드' 등이 있고 그 위쪽으로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 있다. 서재의 심장에는 무엇을 넣어둘까? 나는 즐거운 고민에 빠져 일단 전집에서 '안나 카레리나' 세 권을 가져다 넣어두었다.(이 글을 쓰다말고 일어나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집'도 추가했다.)

서재 심장엔 '안나 카레리나' 세권
한쪽엔 습작·편지 등 '인생 기념품'


여섯 개의 책꽂이로 둘러싸인 책상은 견고한 성채처럼 보인다. 큰 책상에 대한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결혼하면서 6인용 탁자 두 개를 사서 하나는 책상으로, 하나는 식탁으로 쓰고 있다. 이 커다란 짐승 같은 탁자를 책상으로 길들이기 위해 두꺼운 옥스포드 천을 깔고 몇 개의 '성물'을 늘어놓았다. 자주 쓰는 파일꽂이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 필기구와 핸드크림이 꽂힌 도자기통, 나침반이 그려진 문진과 향초 등등이다. 이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있으려니 정찬을 준비하는 집사 같다. 달리보면 나만이 유일한 요리사요 손님이지만 이제부터 이 책상에서 쓰게 될 책들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부풀었다.

새로운 서재에 앉아있으니 사물이 진동한다. 서랍에 넣어둔 물건이 해동된 물고기처럼 은은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뻗어오는 것이다. 오른쪽 대각선 아래에는 사진 앨범과 더불어 중학교 때 쓴 일기장이 있다. 무심코 꺼내 읽다가 몇 페이지 못 읽고 얼른 덮었다. 중학교 2학년의 나는 글씨체부터 내용과 말투까지 모든 것이 낯설다. 명랑함을 과장되게 연기하며 법석을 떠는 이 말투는 대체 어디서 모방한 것일까? 일기장 안에 봉인된 여자아이가 나와 동일인이라는 게 믿어지는가?

한편 왼편의 박스 안에는 대학 때 쓴 습작들, 잡지사를 다니면서 쓴 기사들, 친구들의 편지 뭉치, 남미와 이탈리아에서 사온 엽서 등이 담겨있다. 뭔가를 모으거나 잘 간수하는 편은 아닌데, 지금까지의 이사에서도 난파당하지 않고 승선한 내 인생의 기념품이다. 그 복판에 앉아있으니 새로 만든 서재가 흡사 개인 박물관 같다. 나라는 시간의 자취가 지난 세기의 유물처럼 느껴진다.

방 주인인데 왠지 낯설고 떠돌아
'집 안 이사'가 준 기이한 경험
결국 좋은 순간… 집들이 선물처럼


이상한 일이다. 한두 권씩 사 모은 책을 비롯해 이 방의 모든 물건의 주인은 나이고, 그 중 어떤 것은 이십 년도 더 된 것이다. 그런데도 손님 같은 마음이 되어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식탁-책상 만찬의 요리사이자 손님이 나였듯이 박물관의 주인이자 관람객 또한 나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 방의 주인은 따로 있고, 나는 마치 낯선 곳에 흘러든 것처럼 떠돌고 있다. 이럴 때의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한두 걸음쯤 '물러서는' 느낌이 든다.

내가 나에게서 물러나 진동하는 사물의 침묵을 모종의 소리처럼 듣는 순간은 '집 안 이사'가 준 기이한 경험이다.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상실과 기대가 뒤섞이고 서글프면서도 환상적인 순간. 다 쓰고 보니 결국 좋은 순간인 것 같다. 집들이 선물처럼.

/김성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