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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연극 '잘못된 성장의 사례'(강현주 작·연출, 9월5~23일, 두산아트센터 Space111)는 식물학자들의 이야기다. 무대는 식물 분자생물학 연구실이다. 이곳에 여러 식물학자가 있다. 인턴, 석사과정생, 박사과정생, 박사후 연구원 그리고 교수가 함께 저항성 유전자를 찾고 있다.

연구실이라니. 도무지 사건이 일어날 법한 장소가 아니지 않은가. 연구실이나 실험실의 시간은 되풀이의 시간이지 않은가. 관찰과 실험의 반복과 지속이 연구실의 문법이라면 그것은 동일성의 시간에 속한다. 동일성의 시간 흐름 속에서 사건을 만들어내기는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하지만 연구실이 말하고 있다. 연구실이 단지 이야기의 배경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말하기 시작하면서 연극은 식물의 이야기에서 우리 사회의 이야기로 거듭난다.


연극 '잘못된 성장의 사례'
닦달로 만들어진 어른들 사회
어떤 모습일지 설명 필요 없어


연구실이 들려주는 말은 식물의 상상력을 인간·동물의 상상력으로 치환하게 한다. 식물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어느새 인간·동물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로 바뀌어 있다. 이를테면 "그냥 우리 귀에 조용한 거야. 살려고 바둥대는 생명이 조용할 리가 있어?"라든가, "충분하지 않았겠지. 안전하다는 걸 믿는 데까지 필요한 시간이"라는 대사를 배양실에 있는 애기장대(식물학 실험에서 널리 사용하는 모델 식물)나 귀화식물의 이야기로만 들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연구비 삭감은 곧 인권 삭감"이라는 대사 정도를 제외하고는 온통 식물에 대한 대사뿐이지만 그 모든 말들이 곧 인간·동물의 삶과 생명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식물의 배양실이 아닌 인간·동물의 교실은 어떤가. 조용한가? 안전하다는 걸 믿는 데까지 필요한 시간을 기다려주는가? 이경숙은 "시험은 질문의 향연이어야 한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를 시험에서 만나 세상을 읽고 다시 해석하며 세상을 재창조할 꿈을 꿀 수 있다면 좋다. 질문의 향연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 깊어지고 넓어진다. 질문을 통해 다른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라고 '시험국민의 탄생'에서 말했다. 과연 우리의 시험은 학생을 지적 해방으로 이끌며 성장하도록 충분히 기다려주고 있는가.

평가만을 위한 시험이 아니라 지적 해방을 위한 시험을 치르는 교실을 꿈꾼다. 옆에 있는 친구를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적이라 생각하지 않고 함께 앎의 경계를 확장하는 동료라고 여기는 교실을 꿈꾼다. 하지만 성장을 지켜봐 주기보다는 성적을 내라고 닦달하는 사회에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좋은 평가를 받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쌓은 지식으로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 그렇게 닦달로 만들어진 어른이 넘치는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성장의 완성이 단지 생물학적인 어른이 되는 데 있지 않다면 우리 사회가 기다림의 미학이 확장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통감각이 바뀌어야 한다. 반칠환 시인은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라고 '새해 첫 기적'에서 노래했다. 저마다의 특색에 맞게 저마다의 방법으로 성장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지금 우리 교실에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앉은 채로 도착해 있는 바위를 상상하는 게 이상한가. 우리 교실에서, 우리 사회에서 성장에 대한 공통감각을 바꾸지 못하는 한 그것은 기적으로만 남을지 모른다.

커가는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우리사회 기다림이 필요하다

연극 '잘못된 성장의 사례'는 우리 사회가 지켜봐 주는 시간이 진정 필요한 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저는 걔가 어른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잘 지켜봐 주기만 하면"이라는 대사의 의미가 사람들에게 가 닿기를 바란다.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얼마나 자라야만 성장이 성장일 수 있을까. 이에 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눈에는 아마도 잘못된 성장의 사례가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성장에 필요한 시간이 얼마일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기다림이 필요하다. 사람의 성장을 지켜보는 과정이 배양실의 애기장대를 관찰하는 일과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