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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언이 있다. 헌법 27조 3항은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되어 있다. 재판이 길어질수록 소송당사자의 부담이 커지고 범죄 피해자의 구제가 늦어질 수 있는 만큼 재판은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판사들이 워라밸을 중시하고, 판사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고, 인사이동이 빈번하다는, 혹은 이른바 '사법민주화'로 인해 판사들의 업무 동기가 약해지고 유능한 판사들이 퇴직한다는 지연사유들이 거론되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 국민들은 전혀 다른 사안들에서 '지연된 정의'를 인식한다. 현 야당대표에 대한 수많은 범죄혐의는 수사, 기소, 재판, 국회체포동의 등에서 발목이 잡히고 있다. 그의 선거법 재판사건은 확정된 후에도 '재판거래'의 의혹을 받고 있다. 몇몇 간첩단사건은 변호인 측의 재판방해에 휘말렸고, 피의자들은 석방되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대통령비서실이 총동원된 울산시장 선거개입사건은 그 당사자가 임기를 마치고 나서야 1심 구형이 이루어졌고, 그나마 그 주역들은 수사와 기소에서 빠져버렸다. 전임 법무장관 재판은 공범인 부인이 형 확정으로 복역 중인데도 아직 1심 진행 중이고, 주범일 수도 있는 그의 성인 자녀는 이제야 기소되었다. 이에 조력한 한 국회의원의 재판은 임기를 다 마쳐가는 판국에 대법원에서 표류하고 있다.  

 

정의가 지연되면서 정치적 공방만 거칠게 이루어진다. 정치적 편향성이 강한 검찰과 사법부에 의해서 유력한 정치인들의 재판은 법치의 영역에서 정치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국민들도 어느 순간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이나 정당의 편에 서면서 법치주의에서 벗어난다.

울산시장 선거개입 임기 후 구형 등
정의가 늦춰지면서 정치적 공방만
사적 복수 허용땐 법치주의 붕괴돼

현대에 이르러 시민과 시민사회의 사회적 행위 역시 공공성을 담보해야 한다고 요구된다. 실제로 시민단체는 정당과는 다른 사회적 공공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익집단과 구별된다. 따라서 그들의 목소리는 공익을 담고 있다고 인식된다. 특히 이들은 정당체제가 결여한 대의를 대체할 수도 있고, 사법적 판단에 앞서서 사회적 정의를 대변할 수도 있다고 받아들여진다. 그렇지만 시민사회가 실제로 공공성을 담지한 공적행위자로 인정되지는 않는다. 그 목소리에 공공성을 담고 있지만 형식적으로 사적 기구로 받아들여진다. 불법적이고 불공정한 행위에 대해 정치적, 도덕적 비난을 할 수 있지만 제도적으로 물리적 징계나 제재를 가할 수 없다. 그러나 법치가 붕괴되면서 정치로 대체되는 상황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법치를 대신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한편 민주주의의 정당성이 자리잡으면서 모든 영역에 민주주의를 적용시키려는 시도들이 확산된다. 스스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행위를 민주주의로 정당화한다. 사회적 공분이 높은 사안에 대해서는 개인적, 집단적 목소리를 상대방에게 직접 표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의견 개진이 아니라 사적 제재에 가까운 발언과 행위를 쉽게 표출한다. 교사들의 훈육행위를 자의적 잣대로 '아동학대'로 규정한 결과 그들을 자살로 내몰기도 한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정의의 결손·과잉 사이 우왕좌왕속
개인 인권·자유·법 앞 평등도 훼손


헌법 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모든 국민이 스스로의 주권에 준하는 권력을 행사하려 한다면 나라는 무정부상태가 될 것이다. 자신 혹은 자신의 가족의 자유와 권리가 타인에 의해 침해받았다 해서 그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자유의 침해 여부는 자의적으로 판단할 수 없고, 설사 적절한 판단이 내려진다 해도 사적 복수에 가깝기 떄문이다. 이를 허용한다면 그로 인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발생한다면 사회 자체는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법치주의가 붕괴하고 사회적 합의와 공통 규범이 사라지게 된다.

현존하는 공적 국가는 수많은 '정의의 지연' 사례들을 보여준다. 현존하는 시민사회는 사회적 합의가 없는 자의적인 '정의의 실현' 사례들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의 법치주의가 정의의 결손과 과잉 사이에서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개인의 인권과 자유뿐만 아니라 법 앞의 평등도 같이 훼손되어가고 있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