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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소설가
엄마가 택배로 김치를 보냈다. 한 통은 배추김치, 나머지 한 통은 열무김치. 내가 불러주는 맞춤법 퀴즈를 풀던 아홉 살 딸아이는 김치 때문에 퀴즈가 멈춰 골이 났다. '해도지'가 아닌 '해돋이', '낭떨어지'가 아닌 '낭떠러지', 그런 퀴즈가 요즘 세상에서 제일 재미나단다. 나는 쉬운 문제만 골라낸다. 행여 한 문제라도 틀리면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고 입술을 삐죽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날 내는 문제만 내주어서 수십 번 퀴즈를 풀어도 아이의 맞춤법 실력은 별 발전이 없다. 이걸 왜 저녁마다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를 지경이니 말이다. "엄마가 웃긴 얘기 하나 해줄까?" 김치통을 보고 떠오른 이야기가 있었다. 아이가 눈을 반짝였다.

요즈음 학교 분위기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어릴 적엔 한 학교에 한두 명쯤 유별난 우등생이 있었다. 좋게 말해 우등생이지, 시험 때만 되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선 한 문제라도 틀릴라치면 악을 빽빽 쓰고 시험지를 찢어발기고 온 반 아이들을 정신 사납게 하는 그런 아이 말이다. 도대체 시험이 뭐라고, 시험 문제지 걷어가자마자 서랍 속 참고서 우다다다 뒤져서 정답 찾아보고, 틀렸다 싶으면 세상 떠나가라 울어젖히는 못 말리는 진상.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바로 그런 애였다. 진심이다. 중학교 시절, 나는 평소에는 멀쩡했다. 잘 놀고 잘 웃고 친구들과 잘 지냈다. 친구들의 연애편지도 대필해주고, 그 공으로 바나나우유도 얻어먹었다. 쉬는시간엔 함께 도시락을 까먹고 점심시간엔 친구들과 매점으로 달려가 보름달 빵을 사먹던 평범한 열다섯 살, 중학교 1학년. 그런 내가 시험 때만 되면 돌변했다. 전교 1등을 놓치면 죽는 줄 알았던 나는 한 문제라도 틀리면 문제집을 다 찢어버리고 쓰레기통에 처박은 후 눈물콧물 다 쏟으며 법석을 떨었다. 친구들이고 선생님들이고 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중간고사 가정 시험이었다. '다음 중 김치의 재료가 아닌 것은?'이라는 문제였고, 나에게는 답이 보이지 않았다. 네 개 모두 김치에 들어가는 재료였다. 아마도 마늘, 생강 그런 것이었을 테고 마지막 4번 보기가 '양파'였다. 머리를 쥐어뜯던 나는 답을 골랐고, 틀렸다. 답은 '양파'였다. 늘 그랬듯 가정 문제집과 시험지를 쓰레기통에 처박고 나는 교실을 나가버렸다. 반장이었지만 종례 따위는 내가 걱정할 바가 아니었다. 펑펑 울면서 집으로 갔고, 엄마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왜! 엄마는! 김치에 양파를 넣어? 왜?" 엄마는 얼이 빠졌다. 시험을 끝내고 온 둘째 딸이 저러는 걸 보면 뭔가 사달이 나도 난 거였다. 나는 마룻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통곡하며 엄마에게 따졌다. "우리 집 김치엔 양파가 들어가잖아!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엄마는!" 엄마가 변명했다. "아니, 원래 김치엔 양파를 안 넣어. 양파를 넣으면 물이 생기거든. 그런데 우리는 빨리빨리 담가서 빨리빨리 먹고 치우잖아. 오래 안 두잖아. 그러니까 시원하게 먹으려고 양파를 넣는 거지…." 나는 계속 소리쳤다. "누가 김치 시원하게 해달래? 왜 양파를 넣냐고, 왜!" 저녁에 아버지가 퇴근할 때까지 내 난동은 계속됐고, 아버지는 그런 내 꼴이 기가 막혀 "그래그래, 이제 우리 김치에 양파 넣지 말자. 엄마한테 아빠가 말할게. 양파 넣지 말라고."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이후 정말 양파를 안 넣은 김치를 담근 건 아니었지만 나는 김치 그릇에서 양파를 발견할 때마다 욱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다가 끝내 엄마한테 쫓겨날 뻔했다. "밥 처먹지 마! 공부도 하지 마! 내가 이 꼴 보려고 너를 학교 보내는 줄 알아!"

계속 그렇게 컸다면 쭉쭉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라도 갔으련만,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완전히 역변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공부 따위 옆집 강아지나 하라지, 그런 마음가짐으로 탱자탱자 놀다가 지금 이렇게 지독하게 평범한 작가가 되었다.

양파 이야기를 듣던 딸아이가 깔깔깔 웃는다. "엄마, 완전 말썽쟁이였구나! 시험지를 찢고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그러면 진짜 혼나야 하는 거 아냐?" 그 이야기를 해준 건 맞춤법 퀴즈 틀렸다고 제발 울고불고 하지 말란 뜻이었는데 내 딸은 반성도 없다. 저 반성하라고 해준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김서령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