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jpg
김영호 前 협성대 석좌교수·신학자
칼 포퍼(1902~1994)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20세기 그가 추구한 사회는 '열린 사회'였다. 그가 본 인류의 역사는 '닫힌 사회와 열린 사회 간 투쟁의 역사'이며, 그가 겪은 나치즘과 마르크스주의의 통제된 세상에서 인간이 가야 할 길은 오직 '열린 사회'로 가는 길뿐이라고 주장했다.

칼 포퍼가 주장한 열린 사회는 '개인의 자유로운 독립적 집합으로 비판을 허용하는 다원적 사회'라 기준을 제시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가 생각지 못한 새로운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아마 지금의 우리 열린 사회에 차고 넘치는 '정보의 홍수'를 칼 포퍼는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열린 공간을 넘는 사이버 공간(Cyber Space)이 창조되고 그 공간에서 정제되지 않은 개인 생각이 거의 무절제 되어 열린 공간으로 확산할 능력이 생겼기 때문이다. 유튜브나 인스타 등장으로 기존의 방송, 언론 생태계를 파괴하고 개인의 다양한 목소리가 개인의 공공성 참여라는 긍정적 요소와 함께 검증되지 않은 엄청난 가짜 뉴스를 양산하는 이중적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日 후쿠시마 오염수 토론의 장
과학자 공론후 냉정히 검토해야
그러나 정치적 맹신자 목소리만


이러한 열린 사회의 정보 과열은 특히 정치 영역에서 심각하다. 2003년 광우병 사태 교훈이 있음에도 지금 후쿠시마 오염 처리수 방출에 대한 열린 공간의 토론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이유는 소위 객관성, 과학적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닌 '괴담' 수준의 '단절 사회'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 단절 사회의 확산은 개인의 자유라는 허울 속에서 자기의 관점을 고정화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인공 지능 알고리즘을 통한, 자기 선호 정보만 취득하여 균형감을 상실하는 문제를 노출하고 있다. 소위 '편향 확증'의 정보만 취득함으로써 오는 부작용이다.

정치 분야의 강성 지지자들의 등장은 이런 단절 사회의 대표적 사례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념이 확신이기에 상대방의 주장과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에 반해 10년 전 영국에서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엄스(Rowan Williams, 유신론 대표)와 '만들어진 신'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무신론자 대표)는 '신의 존재'에 대한 토론을 되새김질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토론이 격해지고 상호 비방을 우려했으나 결론적으로 정중하고 진지했으며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를 지켜본 시청자는 이들의 대화 태도에 박수를 보냈다.

다양한 관점을 존중하고 타자에 대한 배려를 가진 세상은 일방적 한쪽의 승리가 없다. 완벽한 사회보다는 완벽한 사회를 향한 대화와 타협, 절차의 중요성이다.

이번에 제기된 후쿠시마 오염수 처리에 관한 토론의 장(場)은 일차적으로 과학의 영역에 속한 부분이다. 전문 과학자 집단 공론(公論)의 장이 먼저 펼쳐지고 청중은 냉정히 검토해야 한다. 그런데도 정치 영역에서 단절된 사회의 맹신자들 목소리만 들린다. 다분히 정치적 선전 선동이다. 이것은 20세기 칼 포퍼가 걱정한 전제주의적 대중 동원, 지성보다 감성을 사용하여 대중의 심리를 교묘히 파고드는 '닫힌 사회'의 21세기 새로운 변형이다.

지성보다 감성 대중심리 파고든
'닫힌 사회'의 21C 새로운 변형

지금은 한 번쯤 자신들이 단절된 사회의 일원인지 냉정하게 자가진단이 필요하다. 자가진단은 의외로 간단하다. 타자에 대한 공감이 있는지가 기준이다. 남자는 여자에 대해, 종교인은 비종교인 혹은 타 종교인에 대해, 그리고 정치적 상대가 타도의 대상인지 상호 관용과 타협이 있는지 자문자답해야 한다.

단절 사회의 오타쿠는 "나는 죄가 없으며 내 행동이 옳다"고 주장한다. 예수 정신은 "누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 대답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요한복음 7장53절~8장11절)라는 의미는 '네가 죄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희 자신이 바로 그 여인'이라고 화두를 던진 것이다. 네가 바로 그 여인(他者)인 것이다.

타자에 대한 관용과 타협이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기에 변형된 단절 사회를 극복하는 진정한 열린 사회를 위한 길이다. 그래야 내 마음의 목소리가 들린다.

/김영호 前 협성대 석좌교수·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