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kaoTalk_20230922_151558287222
임대근 한국외대 융합인재대학 교수가 지난 22일 비대면 화상회의 프로그램으로 열린 '랜선으로 떠나는 방구석 1열 중국 영화여행' 시민강좌에서 '동방의 진주, 1930년대 상하이 영화들'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2023.9.22 /인천대 중국·화교문화연구소 제공

인천대학교 중국·화교문화연구소, 국민대학교 중국인문사회연구소, 인천 서구청, 경인일보가 공동 주최하는 '랜선으로 떠나는 방구석 1열 중국 영화여행' 시민강좌의 마지막 강의가 지난 22일 오후 3시부터 4시30분까지 비대면 화상회의 프로그램 줌(ZOOM)으로 열렸다.

임대근 한국외대 융합인재대학 교수가 '동방의 진주, 1930년대 상하이 영화들'을 주제로 강연했다. → 편집자 주

1922년 제작 영화 지금도 남아
조선출신 김염 수십편 출연 인기
감독·배우 등 시너지로 황금기


■ 다음은 강연요지


최초의 중국영화는 1905년 제작됐다. 일본에서 사진 기술을 배우고 돌아온 런칭타이는 베이징에서 펑타이(豊泰) 사진관을 차려 서양인들의 영화 촬영과 현상을 돕는 일을 했다. 그리고 직접 영화 촬영에 나섰다. 당시 유명한 경극 '정군산'(定軍山)의 주연 배우 탄신페이를 사진관 뒤뜰로 불러 촬영한 영화가 동명의 '정군산'이다. 이 영화는 삼국지의 한 대목을 따서 만든 경극영화다.

중국인들은 초기 영화를 보면서 자신들의 연극 전통 중 하나인 그림자극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서양 그림자극'이라고 불렀다. 1905년부터 시작된 베이징의 영화 제작은 펑타이 사진관이 화재로 소실되며 위기를 맞는다.

이후 중국의 영화 제작을 이어받은 도시가 상하이다. 1913년부터 상하이에서 영화가 제작됐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중국영화는 1922년 제작된 '과일 장수의 사랑'이다. 이 영화는 상영 시간이 20분 정도로, 당시 상하이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특히 당시 할리우드 버스터 키튼의 슬랩스틱코미디 영화에서 많이 영향받은 장면이 드러난다.

상하이는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이 조계(외국인 거주 치외법권 구역)로 삼은 땅이었다. 서양 문물이 자유롭게 물밀듯 들어오는 도시였다. 상하이는 원래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다. 그러다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 결과로 체결된 난징조약(1842년)으로 인해 서양의 조계지가 된다.

1930년대 중국은 일본의 만주 침공과 상하이 침공, 만주국 수립, 중일전쟁 발발 등 급박하게 정세가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하이 영화인들은 '영화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같은 질문은 당시 중국 공산당의 영화에 대한 태도가 영향을 미쳤는데, 영화가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돼야 한다는 강력한 생각이다. 1920년대 상하이 영화는 오락성을 강조하는 영화들이 인기를 얻지만, 1930년대부터는 사회 문제를 다루는 영화가 대거 제작됐다.

롼링위와 김염은 상하이 영화를 대표하는 두 배우다. 롼링위는 흑백영화 30편에서 열연하며 연기에 천부적 재질을 발휘했다. 롼링위는 '연애와 의무' '세 명의 모던 여성' '도시의 밤' 등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손해를 보거나 모욕당하는 여성 역할을 소화했다.

김염은 조선 출신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배우가 된다. 훤칠한 외모와 표준 중국어 발음으로 유성영화시대 꼭 알맞은 배우의 조건을 갖춘 인물로 평가된다. 김염은 '야초한화' '일전매' '연애와 의무' 등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1930년대 상하이 영화는 수많은 제작사, 감독, 배우, 관객, 문학·연극의 영향을 받은 줄거리 등 여러 요소가 한데 얽혀 중국영화의 황금기를 만들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20230922010009280000456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