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시의 죽음이라는 말이 어차피 은유니까 이런 생각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다'라고 하면 앞의 '사람'과 뒤의 '사람'이 다르다. 앞의 '사람'이 물리적이고 개체적인 사람인 데 비해 뒤의 '사람'은 어떤 가치 차원의 내포를 띤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시'를 통칭할 때 그것도 이원적 층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시가 많이 씌어지고 시집이 많이 발간될 때의 '시'가 장르적 성격의 시라면, 시가 죽어가고 있다는 뜻의 '시'는 그에 수반되는 가치 평가를 담고 있지 않은가. 시의 죽음이란 후자의 빈곤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이 위기를 이겨내는 방법은 역설적으로 '시의 죽음'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길밖에 없다. 시의 '죽음'을 통해 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것 말이다.
지금 詩 영향력 보잘것없이 돼버려
그렇지만 언제나 항존하는 힘 유지
물론 소월, 만해가 당대에 대중적으로 널리 소통된 것은 아니다. 이들이 문학하는 사람들의 경험으로 들어온 것은 해방 후 근대적인 국가교육 프로그램이 이루어진 이후다. 그러니까 1920~1930년대의 시집 유통회로와 지금을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고, 해방 후의 제도교육 경험을 치른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시의 영향력 위축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근대 시인들과 지금 시인들 사이에 있는 영향력 차이는, 제도교육을 통한 보편적 교양 체험의 소재로 활용되었던 근대 시인들에 비해 요즘 시인들이 한시적 독서 경험으로 끝난다는 점에 있는 셈이다.
물론 대중성의 문제에서는 소설이 훨씬 타격이 크다. 소설이 하던 대중적 역할은 거의 영화나 게임으로 흡수되고 있고 오히려 시가 하는 부분은 영화나 게임에서 감당하기에는 고유한 몫이 남았다. 섣부르게 얘기하는 사람들은 20세기 전반기가 소설의 시대였다면 20세기 후반은 영화의 시대였고, 21세기는 게임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 어느 가운데 시의 시대는 없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시는 언제나 주변에 그렇게 항존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장르적 고갱이 지키는게 첨단 안목
언어를 통해 씌여지고 읽히고 소통
체험속에 독자적 소중한 영역 형성
장르 확산이라는 것은 예술사의 보편적 현상이다. 시에서 일어나는 지금 현상은 활자의 형태를 퍼포먼스, 즉 보여주기 방식으로 변환시키는 것인데, 그러한 퍼포먼스의 한계는 일회성 혹은 한시성에 있다. 생명력이 굉장히 짧다. 예술사 속에서 장르라는 것이 아주 오랜 세월을 거쳐 굳어졌는데, 그 장르라는 견지에 서서 확산을 바라보면 그 생명은 늘 짧았다. 그 점에서 시라는 장르적 고갱이를 지켜가는 것이 어쩌면 첨단의 안목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시의 미래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언어를 통해 언어를 넘어서려는 열망이 있는 한 언제나 씌어지고 읽히고 소통되고 사람들의 체험 속에 굉장히 독자적이고 소중한 영역을 형성해갈 것이다. 다만 시 텍스트를 이해하고 준별하고 평가하는 비평적 안목의 세련화가 더없이 긴요하다는 점에서 평론하는 사람들의 어깨가 결코 가볍지 않다. 시는 아무튼 유용성과 영향력이라는 효용론적 사고의 저편에서 생성되는 만큼, 지금처럼 교환가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한 유력한 항체로서 더없이 귀중한 역할을 할 것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