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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생 김남조 시인이 지난 10일 별세했다. 시단의 원로는 96세까지 장수하면서 사랑을 노래했다. 그의 부고 기사를 게재한 언론들은 '사랑의 시인'으로 추앙했다. 경인일보 오피니언 필진인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김남조의 시 세계를 "에로스적 사랑과 아가페적 사랑 모두가 선생의 시 전반에 걸친 탐구의 대상"이라고 해설했다. '편지'의 첫 구절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은 본 일이 없다"는 오래오래 회자됐다.

앞서 박종환 전 축구대표팀 감독이 지난 7일 별세했다. 호적엔 1938년생인데 실제론 1936년생이란다.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성장한 무명의 축구 지도자가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4강에 올려 국민영웅이 됐다. '붉은 악마'를 탄생시킨 박종환의 지도 방식은 폭력적이었다. 뺨을 때리고 단체기합을 주고 살인적으로 훈련시켰다. 지금이면 '폭력 감독'으로 퇴출되고 법적 처벌을 받았을 테지만, 언론은 '독사'라는 별명으로 명암을 흐렸다. 독사 감독의 독기 서린 지도에 붉은 유니폼의 선수들은 악마처럼 뛰었다.

사랑의 시인 김남조와 독사 박종환은 청년과 소년으로 식민과 전쟁의 시대를 관통했다. 식민지 국민으로 태어나 해방되자마자 전쟁터 한가운데 팽개쳐졌다. 가난과 죽음이 일상인 비인간적인 시대를 살아가려면 김남조처럼 사랑으로 버티든지, 박종환 같이 독사의 독기로 투쟁해야 했을 테다.

식민과 전쟁의 시대를 기억할 수 있는 85세 이상 인구가 2021년 기준으로 약 99만명 정도다. 이중 90세 이상 초고령 인구는 29만6천여명이다. 지난해 사망자가 37만2천800명인데 70대 이상 고령 사망자가 대부분이니, 암울한 시대를 기억하는 세대는 10년 내에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세대는 사라지는데 시대는 여전히 현재에서 강력하다. 식민과 전쟁의 긴 그림자에서 갈등이 솟구치고 반목하는 시선은 서늘하다. 그러는 사이 순환하는 세계사가 대한민국에 불온해졌다. 유럽과 중동 전쟁이 신냉전의 최전선인 대한민국의 안보와 경제를 위협한다. 혼탁한 과거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혼돈의 시대에 갇힐 형세다.

김남조와 박종환을 보내면서, 사랑과 독기 말고는 삶을 지탱할 수 없었던 시대와의 아름다운 이별을 생각한다. 그래야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아 낼 시대정신을 모색할 수 있지 싶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