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의 핵심 개념으로 노에시스와 노에마가 있다. 노에시스는 의식 작용을, 노에마는 노에시스가 만들어낸 관찰 대상을 뜻한다. 이를 라캉의 '응시(gaze)' 개념으로 환원하면 시선은 주체의 소관이나 응시는 대상에 속한 것이다. 무엇이든 계속 응시하다 보면 김수영의 '풀'처럼 바라봄과 보여짐, 노에마와 노에시스의 역전이 발생한다. 사물과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이 같은 시적 경험은 주체의 시선이 멈추는 시점에서 생겨난다. 응시를 통해 세계와 대상이 물리적·인식적 현실로부터 풀려나는 순간, 그것들은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설계자 다산 유배길 수원까지 가족들 동행
성호 이익, 이고와 선조들 성묘 수시로 찾아
수원문화재단이 운영을 맡고, 화성사업소가 관리하는 수원 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수원과 경기도를 넘어선 대한민국과 세계의 문화자산이다. 그런데 라캉의 응시의 맥락에서 보자면 재단과 사업소가 수원 화성을 관리하는 게 아니라 수원 화성이 재단과 사업소가 관리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 우리가 수원 화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수원 화성이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이다. 수원 화성의 바라봄은 현재적 시점에 고정되지 않고, 통시적이며 광범위하다. 수원 화성이 바라본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
수원 화성의 바라봄은 깊고 넓다. 수원 화성의 기왓장과 여장과 성돌, 총안(銃眼) 속에는 온갖 역사적 기억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수원 화성에 새겨진 기억 속에는 역대급 유명 인사들, 이른바 자신을 찾아온 셀럽들의 방문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수원 화성을 찾은 명사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어떤 기록을 남겼으며, 그것은 어떤 의미망을 이루고 있는가.
수원 화성의 당사자들인 정조·채제공·혜경궁 홍씨·고종·순종 등은 일단 제외하자. 설계자인 다산 정약용만은 예외다. 다산의 수원 화성 방문은 두 개의 층위로 갈린다. 다산은 설계자이자 축성의 책임자였으나 1801년에는 신유사옥으로 영어의 몸이 되어 수원 화성을 지난다. 다산의 유배길에는 수원까지 부인과 가족들이 동행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때 남긴 한시 한 편이 남아있다. 그가 가족과 이별한 것은 팔달문을 지나 세류동, 유천 어디쯤이었다.
전봉준·김원봉·염상섭·최남선·심훈 등 발길
문화자원 잘 활용 의미 풍성… 잘 응시하자
명사들의 수원 화성 방문은 계속 이어진다. 우선 경세치용학파의 대가인 성호 이익은 여주 이씨 조상인 고려시대 문신 이고와 선조들 성묘로 수시로 수원 화성을 찾았고, 녹두장군 전봉준은 압송되면서 수원을 지나갔다. 이 장면은 한승원의 소설 '겨울잠, 봄꽃'에도 슬쩍 등장한다. 의열단을 이끌던 약산 김원봉의 수원 화성 방문은 이원규의 평전 '민족혁명가 김원봉'에 묘사돼 있으며, 우현 고유섭의 방문은 그의 수필 '사적순례기'(신동아, 1934. 8)에, 횡보 염상섭의 방문은 '구 7월 1일 오전 5시 탁랑(濁浪)에 해백(駭魄)된 수원 화홍문'(1922. 9. 3)이란 그의 수필에 생생하게 나오는데, 이는 육당 최남선이 주재한 잡지 '동명'의 기자 신분으로 수해를 입어 누각이 통째로 떠내려간 화홍문 취재기다. 김교신의 방문은 그의 일기(1939. 2. 28)에, 그리고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모델인 최용신의 방문은 유달영 선생의 글에 남아있다. 또 홍성원의 소설 '먼동'과 '남과 북'에도 수원 화성이 등장한다. 이 같은 문화자원을 잘 활용하면 수원 화성의 의미가 더 풍성해질 것이고, 재방문율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수원 화성을 잘 응시하자.
/조성면 객원논설위원·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