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국18현의 면면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그분들의 학문적 입지와 업적에 시비를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편, 조선조 문묘 종사 15현에게는 또 다른 특이점이 있다. 소위 자손이나 제자들이 잘 나갔다는 점이다(최연식 저 '조선의 지식계보학'에서). 제자들이 집권하면 임금께 스승의 문묘 종사를 주청했고, 관철시켰다.
우당 이회영 집안의 독립운동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전 재산을 털어 만주로 이주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와 더불어 잘 알려진 건 쟁쟁한 후손들 이야기다. 이회영의 손자 이종찬은 국정원장까지 역임한 인물이며 현재는 광복회장으로 봉직 중이다. 이종찬의 사촌 이종걸은 국회의원 5선에 민주당 원내대표까지 역임한 중진 정치인이다. 특히 이종걸은 조상의 업적을 기리고 추숭하는데 만전을 기했다.
전재산 털어 무관학교 설립 이회영
광복회장 이종찬·5선 이종걸 후손
육사 '흉상 이전' 반발… 정부 철회
이회영과 대비되는 인물이 홍범도다. 홍범도는 머슴살이까지 할 만큼 힘겨운 유년기를 보냈다. 청년 홍범도는 명성황후 시해 만행 소식을 들은 뒤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그러나 홍범도에 대해서는 청산리전투나 봉오동전투에서의 활약상 정도가 회자 될 뿐 그의 삶 전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게 없다. 몇 년 전 모 방송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나마 그의 말년과 사후에 대해 어렴풋이 알려졌을 뿐이다.
지난 8월 느닷없이 육사 교정에 세워진 5인(홍범도·지청천·이회영·이범석·김좌진)의 흉상 이전 논란이 불거졌다. 이회영의 후손인 광복회장 이종찬은 즉각 반발해 국방부 장관의 경질을 요구했다. 광복회장이라는 공적 권위에 더해 윤석열 대통령 절친의 아버지라는 사적 무게감까지 더하는 광복회장 이종찬의 글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국방부 장관은 전격 사임했고, 5인 흉상 이전논의는 홍범도 흉상만 이전하는 것으로 전환됐다. 광복회장 이종찬의 발언 때문이라고 단정하긴 힘들겠지만 그게 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보기도 힘들다. 결과적으로 쟁쟁한 후손을 둔 이회영 등은 그대로 육사 교정에 남게 됐고, 홍범도 흉상만 이전의 수모를 겪을 판이다.
후손 없는 홍범도만 수모를 겪을판
최초 훈장 추서한 것은 박정희 정부
왜 하필 홍범도 흉상만 이전하겠다는 걸까. 겉으론 그의 말년 친소련 행보와 빨치산 활동 등을 문제 삼는다. 속내는 따로 있는 것 같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국내로 송환된 건 문재인 정권 때였다. 전 정권이 한 일이라면 일단 부정하고 평가절하하는 현 정부의 행태를 생각해 볼 일이다. 말년을 카자흐스탄에서 고려극장 관리인으로 살다가 조용히 생을 마감한 홍범도 장군에겐 후손이 없다. 딱히 걸리적거릴 게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여러모로 홍범도와 대척점에 있는 백선엽에 대한 재평가와 선양에 목을 맨 현 정부의 움직임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착각이다. 홍범도 장군에게 최초로 훈장을 추서한 건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박정희 정부였다. 공적란엔 '만주에서 독립군 지도자 김좌진 장군과 호응하여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고 적혔다. 홍범도 장군에게는 잘 나가는 자식도, 제자도 없지만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에게 빚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홍범도는 그 자체로 독립군의 정신적 지주이자, 상징이다.
천신만고 끝에 유해를 모신 지 2년여 만에 이리 만신창이로 만들어도 되는, 그런 분이 아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 모두 홍범도의 자손이다. 특히 대한민국 국군은 홍범도의 후예들이다. 홍범도 흉상 이전, 모두가 나서서 막을 일이다.
/최준영 사단법인 인문공동체 책고집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