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들 고된 노동 저임금에도 '기부'
이승만 대통령 의지로 1954년 설립
선각자들 '프런티어 정신' 담겨 있어
개척정신·독립운동 산물 되새겨져
인천 넘어 세계 초일류 대학교 염원
인하대학교와 하와이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19세기 말에 하와이는 대규모 플랜테이션에서 생산하는 사탕수수가 주요 수입원이었다. 사탕수수 농장은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했으며 처음에는 중국 이민자를 받았고, 다음에는 일본 이민자를 받았다. 중국인과 일본인 노동자 숫자가 늘어나자 위협을 느낀 농장주들은 중국과 일본 이외의 국가에서 이민자를 물색했다. 그러던 중 하와이 농장주들은 대한제국의 미국 공사인 앨런 공사의 도움으로 대한제국에서 이민자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앨런이 주선한 미국인 데쉴러는 인천에 동서개발 회사를 설립하여 이민자를 모집했지만, 지원자를 구하기 어려웠다. 그는 인천 내리교회 존슨 목사의 도움으로 이민자를 많이 모을 수 있었는데 대부분 기독교 신자이고 제물포 거주자들이었다. 이렇게 모집된 이민자 121명은 1902년 12월22일에 마지막으로 제물포항을 눈에 담고 먼 이국땅을 향했다. 이들은 일본 고베에서 신체 검사를 받고 101명이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13일에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들의 비자에는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직인이 찍혔다. 하와이 이민은 1905년 을사늑약에 의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될 때까지 실시되어 7천226명의 이민자가 이주하였다. 이민자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된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면서도 지속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민자들은 한푼 두푼 돈을 모아 1912년에 하와이로 건너온 박용만 장군과 1913년에 하와이로 건너온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박용만 장군은 무장투쟁을 주장했고, 이승만 박사는 교육과 종교운동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승만 박사는 1918년에 '한인 기독학원'을 설립하여 교육에 힘쓰면서 '외교독립 노선'에 기반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고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하와이 동포들은 한인 기독학원 부지 매각대금과 성금을 모아 고국에 송금하였다. 이에 감격한 이승만 대통령은 인천과 하와이를 기념하여 인하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당시 모금한 '인하공과대학' 설립 자금은 하와이 동포 기부금, 국민 성금, UN 원조금, 공무원들이 추렴한 정부 보조금 등으로 충당하였고, 부지는 인천시가 제공하였다. 이렇듯 인하대학교는 하와이 동포, 국민의 참여, 초대 대통령의 의지로 설립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인하공과대학 개교 기념사에서 "그 가난한 농장에서 번 돈, 어떤 때에는 떡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팔아서 돈푼 모은 이것을 가지고 땅을 사고 집을 짓고 해서 학교를 했다가 거기서 된 돈이 이만치 되어서 대학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내가 이 학교 이름을 인천과 하와이의 연락을 만든 기념으로 그 대학을 인하라 했오"라고 말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과가 분명하지만, 인하대학교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하와이 선조들의 꿈을 실현해 주었다.
이렇듯 인하대학교는 이승만 대통령과 민족 선각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으며, 하와이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고 이민을 떠난 선조들의 프런티어 정신이 담겨있다. 이러한 대학교를 민족대학이라 부르지 않으면 어떤 학교가 과연 민족대학일까? 인하대학교 교정에 서 있는 '대통령 나무'를 보면서 인하대학교가 하와이 이민자들의 개척정신과 독립운동의 산물임을 되새겨 본다. 선조들의 나라 사랑이 담겨있는 인하대학교가 초일류 도시 인천을 넘어 세계 속의 초일류 대학교가 되기를 염원해 본다!
/이재우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