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詐欺)는 언어를 가진 인간만이 가능한 범죄다. 사기꾼 없는 세상은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다.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미혼모 팡틴은 최악의 사기 피해자다. 딸 코제트를 맡아 준 테나르디에 부부의 양육 사기에 걸렸다. 미혼모라는 사실이 드러나 장발장의 공장에서 쫓겨 난 팡틴은 악당들의 악착같은 양육비 요구에 금발을 자르고 이빨까지 뽑아 팔았지만 결국 몸까지 파는 나락으로 떨어져 병으로 죽는다. 사기꾼에게 제대로 걸리면 마지막 동전 한 닢, 영혼 한 줌마저 탈탈 털린다.
사기는 범죄 대상의 신뢰를 이용한다. 사기꾼을 찰떡같이 믿은 피해자는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정서적으로 황폐해진다. '사기꾼이 하는 소리는 숨소리 빼고 다 거짓말'이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지만, 대부분 사기를 당한 후에 깨닫는다. 사기꾼이 작정하고 설계한 사기를 피하기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다.
대한민국은 사기공화국이라는 자조적 공감이 널리 퍼진지 오래다. 이를 증명하는 국제 범죄 통계가 아니더라도, 집안에 사기 피해자 한 두 명 쯤은 있는 현실적인 체감 때문이다. 청년들의 목숨을 앗아간 최근의 전세사기를 비롯해 보험사기, 주식 사기, 다단계 사기, 피싱 사기, 투자 사기, 복권 사기 등 헤아릴 수 없는 사기 범죄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사회 도처에서 진행 중이다.
펜싱 여제 남현희가 인생 최악의 순간에 몰렸다. 지난 23일 한 여성 월간지를 통해 15세 연하 재벌 3세, 전청조와의 재혼 계획을 공개했다. 곧바로 온라인에 전청조에 대한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남현희는 24일 "행복하고 싶다"며 의혹을 부인했다. 의혹은 증거로 사실이 됐다. 전청조는 주민등록상 여성으로 확인됐다. 사기 전과로 복역한 기록도 공개됐다. 사기 치는 녹취록도 방송됐다. 남현희의 희망은 악몽이 됐다. 전청조의 실체를 꿈에도 몰랐던 듯하다. 사기꾼은 집요하다. 25일 새벽 남현희 집 문을 두드리다 긴급체포됐지만 석방됐다.
남현희 소동의 전말과 진상은 조사가 더 필요하지만, 드러난 사건의 개요가 너무 엽기적이라 충격이 더 크다. 사기공화국에서도 전례가 없는 사기 유형이다. 황당한 전청조의 실체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남현희 본인일 테다. 사기 피해 중엔 사기를 당한 수치심도 있다. 팬들의 응원과 지지가 절실하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