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나는 선생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공부했다. 학교의 정규 강의는 말할 것도 없고, 민족문화추진회와 퇴계학연구원 등 선생이 강의하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맹자와 논어를 비롯한 유학의 고전은 물론이고 묵자와 노자와 장자 등 제자백가서까지 배웠다.
내가 들었던 선생의 모든 강의는 다른 사람의 강의로는 대체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롭고 흥미진진했다. 특히 맹자를 강의하실 때면 맹자와 제자들, 당시의 임금들이 강의실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선생은 마치 스스로 맹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연기를 하며 강독하셨는데, 맹자와 대화를 나누던 제자가 실망스러워하는 대목에서는 스스로 그 제자가 되기라도 한 듯 입을 삐죽이 내밀며 강의하셨고 제나라 임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고 할 때는 선생의 안색도 따라서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지금도 맹자의 그 구절들은 선생의 표정과 목소리로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수많은 후학 기른 동양철학계 태두
은사이신 상허 안병주 선생 '타계'
선생은 자신이 이룬 학문적 권위에 기대는 법이 없었다. 고전을 함께 읽을 때 새로운 견해를 이야기하는 제자가 있으면 선생의 풀이와 다르더라도 아낌없는 칭찬으로 높이 평가하셨으며 제자가 작은 성취라도 보이면 언제나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씀으로 격려하셨다. 논어의 한 구절로 '두려워할 만한 존재는 후생(後生)'이라는 이 말씀은 아마도 제자의 성취에 대한 칭찬에 그치지 않고 선생 스스로 분발을 촉구하는 경계의 말씀으로 입에 즐겨 올리셨을 것이다.
하지만 학문적 열정에 관한 한 제자 중 누구도 선생을 두렵게 하지 못했다. 그만큼 선생의 학습량은 한창 젊은 제자들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도저하고 방대했다. 대학원 강독 수업이 있는 날이면 선생은 그전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지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셨는데 대부분 전날 밤을 새워 공부하셨던 내용이었다. 선생은 자주 글을 읽고 쓰다가 잠들곤 했다 하셨는데 책상에서 공부하던 책을 잠자리까지 가져가서 공부하다가 엎드린 채 잠드셨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제자와 후학들에게 한없이 인자한 분이셨지만 학문적으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특히 고전을 풀이할 때 근거가 없는 자의적 판단은 용인하지 않으셨다. 또 스스로 후생이 두렵다 말씀하셨지만 선생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조금이라도 엿본 제자라면 두려워할 만한 존재는 후생이 아니라 바로 선생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자 성취에 칭찬 물론 스스로 분발
공부 중단 기로때 맹자 구절 격려도
가을, 스승을 여읜 마음 더욱 쓸쓸
내게는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 선생의 각별한 가르침이 또 있으니 바로 맹자에 나오는 사반공배(事半功倍)의 가르침이다. 사반공배란 '일은 옛사람의 절반만 해도 공은 두 배가 된다'는 뜻으로 맹자가 자신의 시대에 왕도가 펼쳐지기를 기대하며 한 말이다.
대학 2학년 시절, 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는 동양고전 공부를 그만둘 기로(岐路)에 섰을 때, 선생은 맹자의 이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공부는 옛사람의 절반만 해도 공은 두 배가 넘을 것'이라며 격려해 주셨다. 내가 지금까지 공부를 그만두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선생의 말씀에 기댄 힘이다. 이 가을, 스승을 여읜 마음이 더욱 쓸쓸하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