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 두 개의 키워드가 있다. 책과 일기. 책과 일기에 얽힌 각각의 에피소드가 교차하며 연극을 엮어간다. 우선 책이다. 책 에피소드의 중심인물은 난이다. 난이의 목표는 엄마의 흔적을 찾는 것이다. 책쾌를 하던 엄마가 남긴 과거를 찾아 도착한 곳이 최대감 댁 별당이다. 별당은 만남과 창조의 장소이다. 아버지 최헌과 여러 여인을 만나는 장소이자 동시에 그들과 함께 '박씨전'을 창작하는 장소이다. 연극 '열녀를 위한 장례식'은 금서 목록에도 올랐던 '박씨전'을 가져오면서 살짝 비틀었다. 작자 미상의 '박씨전'을 다수의 여성이 집단 창작했다는 상상력으로 비틀면서 여성 창작 주체의 출현을 알리고 있다. 최대감 집 별당에 모인 여인들은 비밀 독서 계 모임을 이어가다가 책쾌인 난이와의 만남이 촉발하여 마침내 이야기를 창작하기에 이른다.
다음 일기이다. 일기 에피소드의 중심인물은 운선이다. 동생 월령의 죽음으로 열녀문이 세워졌으나 운선은 도무지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운선의 목표는 월령의 흔적을 찾는 것이다. 마침내 일기를 찾는다. 일기는 발견의 장치이다. 그 발견의 결과로 열녀문을 불태우게 된다. 묻히지 않고 증발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기어이 살아남아 전해진 문장들이다. '제가 귀감이 될 거래요', '언니, 배가 고파요', '열녀문이 세워지면 언니도 절 기억해주시겠죠', '다음 꽃놀이 함께 가자는 약속은 못 지킬 것 같아요'. 죽음이 아니라 죽임이다.
이 연극에서 책과 일기는 말하고 기록하여 살아남았으나 언제나 그러한 것은 아니다. 말할 수 없는 자들 앞에는 금기라는 이름표가 붙은 경계선이 놓여 있다. 그 선을 넘지 말라는 주문으로 금기는 상징질서를 가시화한다. 아버지의 이름인 상징질서는 금기의 기나긴 목록을 제시한다. 말할 수 없는 자는 분할선 바깥에 남겨져 무권리의 상태에 처해 있다. 권리를 박탈당한 자에게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언어로 말한다는 건 그러므로 하나의 출현이다. 분할선 너머로의 출현이다. 분할선 저쪽에서 이쪽으로의 출현은 무권리 상태에서 벗어나 권리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별당에 모여 '박씨전'을 창작하는 모습에서, 죽음에 다가가면서도 한 문장 한 문장 일기를 적는 모습에서 그 출현을 본다.
여성 서사 '열녀를 위한 장례식'
'말할 수도 없고 말 하더라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어떻게
들려줄 수 있나' 물음에 대한 답변
'박씨전' 재해석 억압당함 알려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침묵을 깨는 말의 힘을 역설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이 무기입니다. 우리가 말을 하면 말이 남습니다. 우리는 말을 합니다. 우리는 말을 외칩니다. 우리는 말을 들어 올려, 말로 우리 국민의 침묵을 깹니다. 우리는 말을 살게 함으로써 침묵을 죽입니다." 오랜 과거의 조선에서 머나먼 멕시코까지, 아니 지금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말이 없어 소리만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외친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소리는 말이 아니라는 이유로, 언어가 지배하는 규칙 밖의 말이라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들리지 않는 소리의 말이, 들으려 하지 않는 소리의 언어가 쌓이고 또 쌓여 그 응축한 소리가 말로 터지게 되면 금기의 경계선이 무너지게 된다.
연극 '열녀를 위한 장례식'은 출현할 권리를 무대화한 작품이다. 공적 공간에서 발언권을 갖지 못해 말할 수 없는 자와,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할 언어를 갖지 못해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출현이다. 말할 수도 없으며 말하더라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어떻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나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 여성들의 집단 창작의 산물이라는 상상력에 기반하여 '박씨전'을 재해석함으로써 억압당한 자들의 출현을 알리고 있다. "이야기 안에서까지 숨고 싶지 않아"라는 대사는 그러한 맥락에서라야 그 빛을 발한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