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추억 떠올리며 웃은 이유 골몰
문득 낡은 유선 이어폰 보며 확신
시간 지날수록 민망함만 앞서다가
'MZ 트렌드' 말 듣고 당당함 찾아


얼마 전 우연히 길에서 구남친과 마주쳤다. 안부를 나눌 사이는 아니고, 차 한잔할 사이는 더욱 아니고, 그렇다고 못 볼 것 본 사람처럼 홱 야멸치게 돌아설 사이도 아니어서 나는 잠깐 망설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아, 뭘 이렇게 마주쳐… 못 알아본 척할까, 하는 사이에 그가 먼저 환하게 웃어주었다. 얼결에 따라 웃었다. 인사까지 나누지는 않았다. 길을 건너던 중이었으므로 우리는 서로 가던 길을 갔다.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우리가 이렇게 환하게 웃어줄 사이였나? 우리의 마지막이 어땠더라? 도대체 몇 년 만에 만난 거지? 돌이켜 보니 우리는 그냥 모르는 척, 못 본 척 정도가 어울렸을 것 같았다. 격하게 연애했던 사이도 아니고, 피 터지게 싸우며 헤어진 것도 아닌, 어쩌다 만나고 어쩌다 헤어진, 조금은 흐리멍덩한 사이. 굳이 이렇게 햇살도 눈부신 오후, 뿌리 염색 시기를 놓쳐 희끗해진 머리카락을 하고, 대충 차려 입은 모양새로 강의를 가다가 만날 것까진 아니었는데. 그냥 젊었던 시절로 기억에 남는 편이 나았을 텐데. 하지만 그쪽이 먼저 웃어줬잖아. 그것도 아주 환하게. 그러니까 나도 웃는 게 맞았어. 그렇게 어색하고 민망한 재회는 아니었던 거야. 그딴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나는 계속 걸었다.
그런데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 때문이었을 수도 있어. 내 이어폰. 치렁치렁 줄을 늘어뜨린 내 낡은 유선 이어폰! 촌스러운 것이라면 질색하던 그쪽이 그 이어폰을 본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쟤는 저런 구식 이어폰을 여태 끼고 다녀? 옛날엔 저 정도로 촌스럽지는 않았는데? 다 됐네, 다 됐어. 그렇게 어처구니없어하며 웃었던 건지도 몰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건 확신에 가까워졌다. 나는 그 바람에 몹시 고통스러워지고 말았다. 나는 왜 낡아빠진 유선 이어폰 따위를 들고 다니는 것인가. 무선 이어폰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도 있다. 그것도 브랜드별로 구비할 만큼 나도 유행에 민감한 사람이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나는 충전을 해야 하는 무선 이어폰이 귀찮다. 출근길 가방에서 유선 이어폰을 꺼내, 꼬인 줄을 천천히 풀며 지하철을 타러 가고, 좋아하는 노래들을 듣거나 온라인강의를 듣는다. 스카프에 줄이 친친 감기는 날도 있지만 딱히 불편하다 느낀 적이 없고, 가끔 친구들이 "이어폰이 왜 그래? 무선 이어폰 하나 사 줘?" 타박을 해도 "난 이게 좋은데?" 그러고 말았다. 남 눈치를 아예 안 본 건 아닌데, 오가는 젊은 사람들 눈에는 내가 참 촌스러워 보이겠구나, 하면서 혼자 낄낄 웃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남이니까. 모르는 사람이니까. 아무려나 나는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고작 구남친 한 번 마주친 일 가지고 나는 끙끙 병이 날 뻔했다.
"걔가 정말 내 이어폰을 본 거겠지? 그래서 웃었던 거겠지?" 며칠 동안 이어진 내 하소연에 지친 친구가 짧은 영상 한 편을 전해주었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이었는데, 유선 이어폰을 끼고 다니는 힙한 배우 한 명이 "요즘 MZ들은 다 이렇게 유선 이어폰을 쓴다고요. 이게 트렌드라고요" 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정말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런 내 꼴을 보고 친구가 풀풀 웃었다. "이제 더는 괴롭지 않지?" 나는 "응!"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오늘도 강의가 있다. 때가 꼬질꼬질 묻은 내 유선 이어폰은 줄이 배배 꼬여 있지만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천천히 풀면 그만이다. 오늘은 어떤 노래를 들으며 출근을 할까? 벚꽃 피는 계절도 아닌데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이 듣고 싶군. 그대여, 그대여, 하는 그 촌스러운 노랫말은 언제 들어도 귀에 짝짝 붙으니까. 다시 그 구남친과 마주치게 된다면 스쳐 지날 때 꼭 내 유선 이어폰을 한 번 만지작거려줘야지. 아주 당당하게. 나 하나도 나이 들지 않았다고. MZ처럼 아직 힙하다고.
/김서령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