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목민심서'에서 문안 등 제시
지혜뿐아니라 독실한 행실 본보기
아름다운 전통 이제는 보기 어려워
옳고 바른 일은 영원히 역사로 전해
오늘의 목민관들 새겨 들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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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옛날이나 지금이나 큰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은 학자나 어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전해지는 말이 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 임금 아래일 뿐 모든 사람의 위에 있는 사람이 바로 정승이라는 벼슬이었다. 세상에 귀하고 높으며 만인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 왕조시절의 정승이었다. 그렇게 높고 귀한 정승이지만, 학자 한 사람은 정승 셋을 감당한다면서 학자 한 사람이 있는 가문은 정승 셋을 배출한 집안보다 더 우대했다고 전해지는 말이 있다. 그렇게 학자는 우대받아야 할 높고 귀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학문에 버금가는 일은 행실이다. 독실한 행실이 있는 사람 또한 학자처럼 우대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다산은 '목민심서'의 '거현(擧賢)'에서 목민관(도지사·시장·군수·구청장 등 공무원)이 학자나 어진이를 어떻게 예우할 것인가를 제시하였다. "경전을 깊이 연구하고 행실을 돈독하게 닦는 선비가 있으면 마땅히 몸소 그를 방문하고 명절에도 문안을 살펴 예(禮)의 뜻에 맞게 해야 한다(部內有經行篤修之士 宜躬駕以訪之 時節存問 以修禮意)"라고 말하였다.

다산의 뜻은 참으로 깊고 넓었다. 학자나 어진이를 찾아보고 배려하는 일은 목민관이 어진이들에게서 훌륭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벼슬과 물욕에서 벗어나 고매한 학문을 연구하고 독실한 행실을 통해 남의 모범이 되는 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그들의 삶이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임을 알려주는 일이라고 했다. 아무리 오두막집의 궁한 선비라 하더라도 학행을 닦아 명성이 고을에 자자한 사람은 마땅히 몸소 방문하여 싸리로 만든 사립문이 빛나게 해야 한다면서, 그렇게 하는 일이 바로 '백성들에게 선을 권하는 일(勸善于民)'이라면서 목민관은 마땅히 그런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궁벽한 마을이고, 참으로 가난하여 대문도 없는 싸리로 만든 사립문이 빛나게 해주어야 한다니 그 의미가 얼마나 깊은가를 알게 된다. 옳고 바르게 살며 깊은 학문이 깃든 사람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본보기여서 백성들에게 선을 권장하는 일이라고 말한 것이다.

영조·정조 때 뛰어난 영의정으로 화성을 축조하는 데 정약용과 힘을 합했던 번암 채제공은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자 안산의 성호장에 숨어 살면서 일생 동안 학문만 연구하고 제자들만 양성한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 성호 이익을 찾아뵌 적이 있다. 성호의 학문에 감화되어 뒷날 성호의 제자로 알려진 채제공은 그런 학자를 방문하여 위로하고 찬양해 주는 일을 했고, 성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성호의 학문과 사상, 인물과 품행을 제대로 기술하여 세상에 알려준 공을 세우기도 했다.

목민관이 자신의 관내에 있는 원로·학자·어진이를 방문하는 그런 아름다운 전통은 이제는 보기가 어렵다. 백성들에게 착함을 권하는 그런 아름다운 심방(尋訪), 이제는 다시 일으킬 수 없을 것인가.

은(殷)나라의 유신(遺臣)으로, 상용(商容)이라는 사람이 학문과 덕이 높았다. 고대의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그가 사는 마을을 지나면서 집을 방문하여 경의를 표하였다. 후한(後漢)의 진중거(陳仲擧)라는 높은 벼슬아치는 고을의 태수가 되어 부임하자 집무실에도 들르지 않고 그 지방에 숨어 살던 고사(高士)의 이름을 듣고 직접 방문하는 일부터 했다. 그의 이름이 서유자(徐孺子)인데, 주변 사람들이 먼저 집무실에 들른 뒤에 가야 한다고 했으나, 진중거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곧장 서유자를 찾아가면서 무왕도 상용을 먼저 방문했는데 "내가 어진이에게 예를 다함이 무슨 잘못인가(吾之禮賢 有何不可)"라고 말하며 서유자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했다.

그렇다. 옳고 바른 일은 영원히 역사에 전해진다. 무왕 같은 천자도 선비를 예방(禮訪)하는데 태수가 왜 선비를 예방하지 않겠는가. 오늘의 목민관들이 새겨서 들어야 할 이야기다. 높은 학문과 탁월한 인격의 소유자들을 찾아뵙고 지혜도 듣고 또 그들의 삶을 위로해주고 격려하는 일에 게으를 필요가 있겠는가. 경기도 관찰사로 숨어 살던 성호 이익을 찾아뵙던 번암 채제공의 일을 기억해야 한다.

/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