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29일(현지시간) 100세 나이로 코네티컷 자택에서 별세했다. 키신저는 미·소 냉전시대의 미국 외교를 지휘하고 전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한 국제외교의 거물이다. 사망 전까지도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예방을 받으며 국제외교의 멘토로 대접받았다. 지난 7월엔 중국을 100번째 방문해 시진핑에게 극진한 환대를 받기도 했다.
키신저 외교의 요체는 현실정치이다. 마키아벨리즘과 맥락이 통한다. 이념과 도덕보다는 현실적인 권력에 집중해 외교정책을 펼쳤다. 냉전시대 미국 최대의 적은 소련이었다. 키신저 외교는 소련으로부터 미국의 국익을 지키는 데 있었고, 이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세계사에 핑퐁외교로 기록된 미·중 관계정상화도 소련과 중국의 미묘한 갈등을 파고 든 현실외교의 개가였다. 미·중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소련을 견제한 전형적인 이이제이 외교로 미·중 수교의 발판을 마련했고, 국제무대에서 고립된 소련은 개혁·개방을 거칠게 추진하다 제풀에 무너졌다.
키신저의 미국 중심 외교는 약소국에 가혹한 결과를 초래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미군 철수에 반발해 핵무장을 추진하자 키신저의 미 국무부가 철저히 막고 나섰다. 대신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엔 눈 감았다. 칠레 군부의 쿠데타를 지원해 합법적인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100세까지 유지한 현실 감각 덕분에 전세계의 정치인, 경제인들이 그를 찾아 조언을 구했고, 그의 영향력은 건재했다. 반면 마키아벨리즘 외교의 그늘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그를 전범으로 규정한다. 냉전과 무한경쟁시대를 관통해 100년 동안 국제적 거물로 살았으니 쌓아 온 공과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어쩔 수 없을 테다.
하지만 냉전의 사슬에 옭매인 우리 입장에서 보면 키신저 외교는 양지에서 비판하되 음지에서 실행해야 할 전범일 수 있다. "외교정책에서 완벽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국가는 완벽성도 안보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1994년 포린어페어스가 게재한 키신저 기고문의 한 대목이다. 그의 말대로 "힘이 최고의 심판자인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않을 것이다.
한반도의 심판자는 핵무장을 한 북한이다. 말로 달래고 을러댈 자격은 우리 몫이 아니라 힘을 가진 북한의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 인사라면 '키신저'를 독해해봐야 한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