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 개봉 2주만에 관객 500만 돌파
소시민 모습 보단 엘리트끼리 싸움 부각
원칙주의 이태신, 군인 자세로 공공선 좇을뿐
비합리주의 승리 보이며 색다른 관점서 역사 조명
제주4·3, 6·25전쟁, 5·18민주화운동…. 겨우 촌수 하나만 건너도 우리는 민중들의 삶을 할퀴고 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생생히 들을 수 있다. 조부모로부터 부모에게, 부모에서 자식으로. 참상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뼈에 설움을 진하게 아로새겼다. 그렇게 민중들이 역사의 피해자이자 목격자, 그리고 당사자임을 공언한다.
그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다룬 무수한 영화들이 소시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민중과 독재정권으로 명확하게 갈리는 두 세계는 그 자체로 선악 구도를 형성해 쉽게 공감을 얻는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시스템을 바꾸려 한다거나, 정권의 탄압에 무참히 으스러진 소시민을 비춘 모습은 익숙한 장면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앞선 영화들이 진보적 관점을 띠었던 이유다.
최근 개봉 2주만에 관객 500만명을 달성한 영화 '서울의 봄'은 신군부 세력이 벌인 12·12 군사반란을 소재로 삼았지만, 진보를 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이태신(정우성)과 전두광(황정민)이 벌이는 대결은 선악 구도는 선명하나 어디까지나 '투스타', 엘리트끼리의 싸움이다. 으레 그리던 민중의 아픔을 부각하는 장면은 러닝타임 내내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영화는 두 엘리트의 싸움을 '보수' 대 '비합리주의'의 대결로 몰아붙인다.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이 전두광 일당의 쿠데타를 저지하려는 이유는 정당성의 부재에 있다. 이들의 쿠데타는 기존 시스템을 무력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동체를 위협한다. 전두광은 좌천당할 위기에 처하자 사조직 '하나회'를 필두로 쿠데타를 도모한다. 반공주의가 득세하던 시대임에도 쿠데타 성공을 위해 최전방을 지키던 9사단까지 서울로 불러들이는 모습은 아이러니의 극치다.
구원자가 절실한 상황이지만 주인공 이태신은 '정의의 사도'로 등장하지 않는다. 감독은 선악 구도에서 '선'을 맡은 이태신 캐릭터를 신파적으로 사용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태신은 시스템을 부순다기보다는 시스템 안에서 부품들이 제대로 굴러가도록 정비하는 역할에 가깝다. 그저 군인으로서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며 공공선을 좇을 뿐이다.
18년간의 독재가 끝나고 불현듯 찾아온 서울의 봄. 이 가운데서 군인이 해야 할 일은 지도자의 공백을 틈타 침투해올 주적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군인이라는 직업인으로서 공동체에 기여할 가장 근본적이고 최우선적인 원칙이다.
사리사욕에 찌든 비합리적 세력 하나회에 의해 공공선이 무너지고, 결국 개인의 자유가 또다시 억압되는 상황을 이태신은 가만히 지켜볼 수 없다. 조국에 충성해야 할 군인이 하나회에 맹세하는 꼴은 이태신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처사다. 전두광은 위협적인 이태신을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이려 하나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끝내 전두광의 비합리주의가 승리를 쟁취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한국 현대사가 안고 있는 비참함을 강조한다.
어느 정통 보수주의자 군인의 분투를 그린 영화 '서울의 봄'. 현대사의 비극을 역사 왜곡 없이 전형에서 벗어난 관점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하다.
어쩌면 독재자를 비판한다고 해서 마냥 '진보영화'라거나,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며 독재자를 덮어놓고 찬양하기에 '보수영화'라고 일컫는 잣대도 어느새 허물어져 간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