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초반 국무총리실 출입기자 시절 기자단의 서해 안보시찰 기회가 주어졌다. 인천 해군 2함대사령부에서 승선한 구축함은 거대했다. 하지만 파도엔 속수무책, 구축함이 용왕님에게 절을 할 때마다, 기자들의 위장은 가벼워졌다.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참수리정에 옮겨탄 뒤, 해안에서 어선으로 갈아타고 섬에 도착했다. 멀미에 기진맥진인데도 최서단 접적지역 영토에 서린 적막한 비장감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백령도는 군사요새였다. 섬엔 유사시 옥쇄 전투를 대비한 군사용 지하터널이 벙커와 벙커를 잇고 있었고, 해병 장병들은 실전과 같은 전투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백령도는 또 천혜의 명승지였다. 두무진, 사곶해변, 몽돌해변으로 이어진 해안의 절경은 인적이 없어 아름답기가 더욱 또렷했다. 고지에 서면 한국전쟁 전까지 우리 영토였던 황해도 장산곶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군사적 긴장과 천혜의 경관 속에서 백령도 국민들은 풍족한 어족자원에 기대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백령도의 외로움은 그때보다 지금이 더한 듯싶다. 30년 동안 뭍에선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도시는 더욱 휘황찬란해졌고, 사람들의 생활방식도 사고방식도 혁명적으로 전환됐다. 군사적, 지리적, 정서적 요인으로 백령도와 육지의 시차는 다르다. 2002년 백령도 국민이 연평해전으로 전시 상태에 빠졌을 때 육지 사람들은 월드컵 경기장에 있었던 식이다.
9·19군사합의 효력정지 이후 인적이 끊긴 백령도 해안에 쓰레기만 널렸단다.([현장르포] 12월 6, 7일 보도)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 이후 정부가 군사합의 효력정지를 선언하자, 북한은 파기를 선언하고 해안포문을 개방했다. 남북 긴장이 고조된 마당에 관광객이 모일 리 없다. 사람 대신 중국발 쓰레기만 사곶과 콩돌해변을 가득 채웠다.
백령도의 외로움은 뭍의 무관심으로 더욱 사무친다. 대형 카페리가 운항을 멈춘 지 1년이 넘었는데도 신규 선사 공모는 지지부진이다. 하마스의 침공에 전세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귀국했듯이, 군사적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육지 사람들이 백령도를 가득 메운다면 국토와 국민의 유대감은 더욱 높아질 테고 백령도 사람들의 불안은 절로 진정될 테다. 하지만 현실은 인천시장의 연평도 시찰도 풍랑으로 취소되는 형편이다.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5도를 찾아가는 섬으로 만들어야 국방이 완성된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