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국악·무용사 담은 ‘인천 가무악희’ 출간
1920년 이우구락부부터 현재까지 100년 다뤄
사람들 행복하게 해주는 것… 국악하는 이유
지난 19일 버텀라인서 공연 열어 음악·춤 재현
1985년 제1회 객석예술평론상을 받은 ‘1호 국악평론가’로 국악의 예술적 지평을 넓혀 온 윤중강 평론가는 1959년 12월 인천 중구 경동 싸리재에서 태어났다. 경동사거리, 배다리, 율목공원, 자유공원 등 인천 원도심 곳곳이 ‘싸리재 키즈’ 윤중강의 놀이터였다.
1963년 2월 율목공원에 인천시(당시 유승원 인천시장) 지원과 인천 국악인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경아대’(景雅臺)는 일종의 인천 국악원이었다. 1960년대 인천 국악인들은 경아대에 모여 부채춤, 장구춤, 삼고무, 오고무 등을 연습하고 가르쳤다. 어린 윤중강은 경아대를 보며 국악에 눈을 떴다.
윤중강 평론가가 인천의 국악과 무용 100년 역사를 발굴·복원한 책 ‘인천 가무악희(歌舞樂戲)’를 최근 펴냈다. 올해로 40년 된 인천의 재즈클럽 버텀라인에서 지난 19일 오후 출판 기념 공연 ‘인천 국악 화양연화’를 개최했다.
공연을 앞두고 버텀라인에서 만난 윤 평론가는 “1920년 인천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지식인들이 ‘이우구락부’를 창설해 1인 1국악기를 배우고 활동한 것이 인천 풍류의 시작”이라며 “그로부터 2020년까지 100년의 역사를 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우구락부는 1923년 7월 인천으로 돌아온 ‘하와이 동포 방문단’ 환영회에서 공연한 기록이 있다. 인천은 1902년 12월 최초의 이민 출발지였고, 하와이로 떠난 첫 이민자 상당수는 내리교회 교인이었다. 20년 머나먼 여정 끝에 고국에 돌아온 동포들이 환영회에서 국악을 듣는 심정은 어땠을까.
윤 평론가는 이우구락부로 명명하고자 ‘논어’에서 가져온 구절 ‘이우보인’(以友補仁)이야말로 인천 국악의 정신이라고 여긴다. 윤 평론가는 “벗들(友)과 함께 어짐(仁)을 서로 보충(補)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자는 정신은 제가 국악을 사람들에게 나누는 이유이기도 하다”며 “인천의 가무악희는 이우보인을 지향해야 한다”고 했다.
이날 공연은 1960년대 인천 전통예술 대가인 민천식(1898~1967) 춤방, 이두칠(1901~1975) 율방, 양소운(1924~2008) 춤방을 재조명했다. 국악, 춤 공연을 펼친 건 인천 예인들의 후손이나 제자들이었다.
윤 평론가는 “실향민인 민천식 선생은 봉산탈춤으로 무형문화재가 됐고, 문화재로 지정된 날 세상을 떠났다는 일화가 있는데, 제자들이 그의 뜻을 이어갔다”며 “이우구락부의 맥을 이은 이두칠 선생은 대금과 가야금의 명수로, 일종의 국악 연주 공간이었던 ‘송악장’(현 인천시민愛집)을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인천시립무용단 역사도 책에서 다뤘다. 윤 평론가는 “1960~70년대 인천 여학생들에게 가장 있기 있는 학원이 무용학원일 정도로 무용 교육이 활발한 때가 있었다”며 “현재 인천에 무용학과가 있는 대학이 없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윤 평론가는 지난해 말 서울시 문화상(국악)을 수상했는데, 서울시장에게 상패를 받으면서 ‘여기가 인천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고향에 애정이 깊다. 그는 “인천의 국악은 로컬(지역)과 실향민 등 디아스포라가 공존하며 발전했으므로 서울과도 다른 특징이 있다”며 “다음 주제로는 인천의 풍물을 깊이 파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