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개 암자 존재했다는 구전… 불교와 인연
유교·천주교 유산도 품은 흔치 않은 사례
山 중심되어 지역 교류 모델로 발전시키길
수부도시 수원의 진산답게 광교산은 수원·화성·용인·안양 등 일대 모든 하천의 시발점이요 근원이 되고 있다. 수원이 매년 반복되는 폭우와 태풍에도 다른 도시에 비해 수해 피해를 거의 입지 않는 것도 물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시작되고 흘러나가는 도시 입지의 특성 때문이다.
광교산의 옛 이름은 광악산(光岳山) 또는 광옥산(光獄山)이었다가 928년 견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왕건이 이곳 행궁에 머물고 있다가 이 산에서 한줄기 광채가 하늘로 솟는 것을 보고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 하면서 친히 광교산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광교산에는 창성사지·광교사지·미학사지 등 절터가 확인되고 있으며, 고려 시대에는 89개에 이르는 암자가 있었다는 얘기가 구전으로 내려올 정도로 광교산은 불교와 인연이 깊다.
그렇다고 광교산에 불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광교산 자락이 뻗어 있는 용인시 수지구에 자리 잡은 심곡서원은 조선 중종 때 문신으로 사림파의 영수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효종 때(1650년)에 건립된 사액서원이다. 서원의 맞은편에는 정암의 묘역이 조성돼 있다. 그리고 그 인근에 청천부원군 심온과 혜령군·예천군 묘가 들어서 있으니 광교산에는 유교문화가 약여하게 살아있다.
여기에 더해 천주교 관련 유적도 있다. 수지구 동천동 주택가 인근의 손골성지가 그러한데, 이곳에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에 순교한 신자들과 성 김(도리) 헨리코 신부,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를 기리는 비석과 동상이 있다. 손골이라는 이름은 직역하면 '향기로운 골짜기'라는 뜻을 지닌 손곡(蓀谷)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정암 조광조와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 신부님 외에도 고려 의종 시대 고승인 현오 국사를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는데, 서봉사지 '현오국사비'는 보물 9호다. 이들은 광교산 자락에 걸쳐있는 종교문화유산들이니 광교산에는 유교·불교·천주교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는 셈이다.
이밖에 광교산 중턱에는 병자호란 당시 광교산 전투에서 청 태종의 부마 양고리(楊古利)와 장수 두 명을 사살하고 대승을 이끈 김준용 장군 전승비가 있고, 고려조 한림학사 이고 선생 묘도 광교산에 있으며, 수원시립박물관과 광교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으니 광교산은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 문화권(文化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산을 중심으로 문화론을 전개한 사례로 육당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이 있다. 불함문화론은 1925년 12월에 집필됐고, 1927년 8월 일본어로 발표됐다. 단군 연구의 획기적 가설로 평가받는 이 논문은 백두산과 한민족이 중심이 되는 고대문화와 관련된 글로 명백히 식민사관에 대한 대항담론이었다. 그러나 동방문화의 연원과 공통점을 밝히는데 집중하다보니 의도하지 않게 대동아공영이라는 제국주의 논리에 편입, 포섭되는 결과를 낳았다. 민족주의를 강조하면 할수록 제국주의 논리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는 시대적 한계라는 역설이 장벽처럼 놓여 있었다.
그러나 육당의 천재성과 발상은 매우 탁월하다 할 수 있고, '밝'과 '불함' 등 산을 중심으로 한 입론은 지금 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불함은 몽골어 '부르칸'에서 왔는데, 태양숭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전 세계 어디에도 하나의 산이 이렇게 여러 종교문화를 품고 있는 사례는 거의 없다. 이러한 광교산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지역학 연구 주제로, 나아가 지역 간 교류 및 협력의 모델로 발전시켜 볼 필요가 있다.
/조성면 객원논설위원·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