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촉·질책에 심지어 거절당한다
아침꽃 저녁에 주워야 하는 시절
미몽 거둬내면 걸을 길만 눈앞에
새로운 한해 다시한번 살아냅시다
'외침'은 루쉰이 서른여덟에서 마흔둘까지 썼던 글이고 '방황'은 그가 마흔넷에서 마흔다섯까지 썼던 글이다. '아침꽃 저녁에 줍다'는 마흔여섯, 1926년에 쓴 글이다. '외침'은 적막에 휩싸여 있던 그가 마침내 적막에서 나와 그동안 못 했던 말을 세상을 향해 외치듯 토해낸 글이고, '방황'은 외침이 그랬듯 세상의 숨결 하나도 바꾸지 못한다는 허무, 적막, 좌절, 그로인한 분노에 대해 쓴 글이다. '아침꽃 저녁에 줍다'는 지금까지의 글과는 달리 외부가 아니라 자신, 현실과 미래가 아니라 과거, 열정과 분노의 뜨거운 감정이 아니라 회상, 애수로 쓴 글이나 평온함 보다는 적막에 가까운 글이다. 1926년의 중국은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반제운동으로 이어진 '여사대 사건', '3·18참사' 등의 사건을 겪었고, 루쉰은 이로 인한 제자의 죽음, 수배로 인한 도피, 문학적 동지이기도 했던 동생 주작인과의 갈등을 겪으며 분노와 열망조차도 꺾인 시절이었다. 이 시기는 신해혁명 이후 더는 이어지지 못한 혁명 앞에서 허무와 적막으로 비문을 베껴쓰던 1910년과도 닮은 시절이었다. 1910년의 그는 외침과 방황을 통해 민중의 정신을 개조하고, 그것이 혁명의 토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문학은 무언가를 바꿀 수 없었고, 가까운 이의 죽음도 막지 못했다. 문학은 공허했다. 1926년의 루쉰은 그것이 분노든, 풍자든, 애도든 문학이 청년의 피를 막아낼 수 없다고 통한했다. 루쉰에게 그 시절은 스스로를 마취시킬 수밖에 없는 시절이기도 했다.
아침꽃 저녁에 줍는 시절을 넘어.
그러나 1926년의 적막은 1910년과는 달랐다. 1926년의 적막은, 어떤 기대도 없이 자신 안으로 침잠하며 만들어진 적막이 아니라, 다시 문을 열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고 외칠 준비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을 때에는 절망에 빠져 자신을 소홀히 하거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살아내는 수밖에 없는데 그가 선택한 방법은 후자였다. 그는 한탄하거나 비탄하는 대신 지나왔던 시간을 다듬어 보았다. 그 속에서 느꼈던 소소한 기쁨, 어리석음, 분노, 믿음, 배반, 그리고 그러한 감정이 순환되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희망과 마찬가지로 절망도 미몽'일 뿐인 것이다. 1936년 지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는 혁명을 위한 투쟁을 지속했다. 그의 혁명은 약자가 권력의 횡포 앞에 저항하는 혁명뿐 아니라 개인이 끊임없이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해 각성함으로써 이루어가는 혁명이기도 했다. 그는 그런 혁명에 대해 말하고 싶었고 압박과 억압 속에서도 그 말을 멈추지 않은 건 애정, 그리고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희망' 때문이었다.
아침꽃을 저녁에 주워 담는 일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던 시절도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삶 주위에 포진한 실존을 포기한 적은 없는 것이다. 아침꽃 저녁에 줍는 시절은 한 존재에게 일어난 사건일 뿐 그것은 좌절이거나 희망이란 이름의 미몽일 순 없었고, 그것이 그가 마지막까지 혁명을, 증오를 통해 애정을 이야기하는 힘이 될 수 있었다.
희망이 미몽인 것처럼 절망도 미몽.
삶은 때론 절망으로 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내고 있는데도 세상으로부터 재촉받고, 질책받고, 심지어 거절당한다. 어느 순간 애써 쌓아 놓았던 신뢰와 경력이 무너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럴 때면 삶은 늘 절망의 연속이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 그가 살아 내었던 삶, 그 삶 속에서 그가 건져낸 통렬한 사유의 언어를 생각한다. '희망이 미몽인 것처럼 절망도 미몽이야. 창이 없는 쇠로 된 방에서 느끼는 절망도 미몽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희망도 미몽이야. 할 수 있는 일은 희망이든 절망이든, 적막이든 삶에게 그대로 자리를 내어주는 것, 그래서 타협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고 증오하면서도 삶을 살아 내는 것. 주어진 길을 단지 걸어가는 것. 그뿐이야.'
아침꽃을 저녁에 주워야 하는 시절, 미몽을 거두어 내면 뚜벅뚜벅 살아내고 걸어갈 길만 눈앞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새로운 한 해다. 다시 한 번. 함께. 살아 냅시다.
/김명하 안산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민교협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