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무아경에 빠지게하는 '나비'
기억이 활짝 날개를 젖히는 순간
몰두했던 밤 생생하게 되살아나
시간을 안 믿지만 부디 탈출하는
멋진 순간 새해엔 더많이 만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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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소설가
최근에 쓰고 있는 소설에는 꿈과 현실이 반대로 작동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현실이 진창일수록 꿈속이 찬란해지는 주인공은 어느 날 거래를 하게 되고…. 독자들이 나중에 읽으셔야 하니까 이하 내용은 생략, 아무튼 지금 내게 필요한 자료는 독특하고 풍성한 꿈들이다. 그래서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은 강력한 꿈, 사실상 유래가 있는 꿈, 꿈꾼 지가 너무 오래되어 어느 순간부터 소설가의 언어로 오염된 꿈들을 캐고 있다. 그러다 꿈과는 상관없는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십여 전에 해외 레지던스 작가로 선정되어 쿠바에 3개월간 체류한 적이 있다. 그때 알게 된 이들과 2박 3일간 동행했다.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K, 그녀의 다섯 살짜리 아들 J, 일 때문에 이들 모자와 함께하는 대학을 갓 졸업한 R. 이 세 명과 어느 리조트에서 주말을 보내기로 했다. 듣자니 하루에 2만5천원만 내면 숙박은 물론 식사와 수영장, 무제한의 맥주와 닭튀김이 제공되는 리조트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리조트 앞 바다와 수영장을 오가며 물에서 나오지 않았고, 닭튀김도 실컷 먹었다.

저녁이 되자 일행은 태양과 수영에 지쳐 일찍 곯아떨어졌다. 선잠에서 깨어난 나는 살그머니 밖으로 빠져나와 수영장 가장자리에 앉았다. 야자수 너머 달이 떠있고, 멀지 않은 곳에서 밴드의 음악이 들려왔다. 라틴 특유의 시끌벅적하고 쿵짝거리는 리듬, 춤추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아득히 메아리쳤다. 내 옆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키 큰 화초가 서 있었는데 달빛을 받아 음영이 칼날처럼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어 큰 창처럼 보였다.

몸에서 잠과 더위가 빠져나가자 미지근한 욕망이 고였다. 무언가 쓰고 싶다는 욕망. 다행히 늘 들고 다니는 펜이 끼워진 수첩이 손에 있었다. 쓸 것은 오로지 묘사뿐. 우선 숙소의 일행이 떠올랐다. 나무로 만들어진 방갈로 안에는 선풍기가 돌아가고 엄마와 아들, 젊은 처녀의 잠은 탐욕스럽고 적나라하다. 카리브의 밤이어서 그럴까, 싱싱한 모든 것들이 나체처럼 느껴진다. 그들의 깊고 두터운 숨소리에 보이지 않는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것 같았다. 방을 나올 때 정글을 빠져나오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아련하게 들려오는 마리아치의 소리는 이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애달파 하는 것처럼 들린다. 사람들의 박수와 함성조차도 애상적이다. 밤은 푸르고 너머의 검은 파도를 이겨낼 수 없으니까. 수영장은 매끄럽게 코팅된 딱딱한 덩어리 같고, 선베드는 관속으로 들어간 죽은 자가 누웠다 일어선 것 같은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감각이었다. 그림으로 치면 크로키 같은 것을 그리려 했는데, 종이에 새겨진 것은 생명이 막 빠져나간 자리에 남겨진 죽음의 이미지뿐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 여름밤의 기억이 완벽하게 되살아나자 2024년의 나는 더할 수 없이 행복해졌다.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에는 나비채집에 빠져있던 소년시절이 나온다. '나는 시간을 믿지 않는다. 내 마법의 융단을 사용한 후에, 한 부분과 다른 부분의 무의가 겹쳐지도록 접어두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무아경,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다. 마치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달려 들어가고 있는 순간적인 진공과도 같다'.

나를 무아경에 빠지게 만드는 '나비'는 기억이 활짝 날개를 열어젖히는 순간, 머나먼 이국의 수영장 가두리에 앉은 내가 들이마시고 몰두했던 밤이 생생하게 되살아날 때의 진공이다. 그 순간은 완벽한 대칭을 이룬 나비가 사뿐히 내 앞에서 비상하는 찰나다. 이 지극한 행복을 고정시키기 위해 언어라는 핀을 깊게 찔러 박제를 만들어 보지만 바르르 떨리던 생명력은 이미 빠져나간 후. 그럼에도 나는 만족한다. '시간 순서대로' 작동하는 일상의 감각에서 살짝 빠져나올 수 있으므로. 나 역시 나보코프와 같은 생각이다. 나는 시간을 믿지 않는다. 부디 시간에서 탈출하는 멋진 순간을 새해에 더 많이 만나게 되기를.

/김성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