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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디아스포라영화제 자문위원
작년 12월 서경식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타계 소식을 접했습니다. 올해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파트너인 후나하시 유코 선생님이 건네주신 아이스크림을 드시며 웃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할 정도로, 선생님의 부재가 실감나지 않지만 짧은 지면에라도 선생님과의 인연을 남겨 놓고 싶어서 이 글을 씁니다.

선생님의 책을 뒤적이다가, 시부야 도모미 교수의 '서경식 스쿨'이라는 표현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서경식 스쿨은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느슨한 모임'인데, '학점이나 학위와는 상관없이 서경식에게 무언가를 배우고자 모인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저 역시 자발적인 '서경식 스쿨'의 열혈 학생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디아스포라'라는 단어 자체를 선생님의 책에서 처음 접했고, '모국어'와 '모어'의 다른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글을 읽고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2006년에 나온 '디아스포라 기행' 책 앞쪽에 선생님의 필체가 그대로 남아있는 걸 보면, 그때 저는 막 '서경식 스쿨'에 입학했던 셈입니다. 선생님의 책들을 찾아 읽고, 책에 등장하는 작가들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좁았던 제 인식과 사유도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덕에 2013년부터 디아스포라영화제를 겁 없이 시작할 수 있었고, 선생님도 인천으로 초대드릴 수 있었습니다.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선생님의 강연이나 토크가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사람들이 선생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공식 행사가 끝난 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온 서경식 스쿨의 학생들은 선생님과 계속 함께하고 싶어했습니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정연두 작가와의 토크 이후에도 광화문 모처 카페에 사람들이 '다글다글' 모여있었지요. 심지어 서경식 선생님은 도착하지 않으셨는데도, 후나하시 유코 선생님과 일본 유학생, 번역가, 철학자, 대학원생, 활동가 등 실로 다양한 배경과 연령대의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서경식과 후나하시 유코 선생님을 아끼고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한 자리에 둘러앉아있던 사람들, 그 분위기는 '다글다글'이란 표현으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네요.

선생님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도 편안하고, 격의 없이 대하는 방법을 알고 계셨지요. 후나하시 유코 선생님과 함께 매년 잊지 않고 인천을 찾아주셨고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영화나 책을 함께 보자고 제안해주시곤 했습니다. '디아스포라영화제의 마스코트'라는 애정이 듬뿍 담긴 별명이 붙을 정도로, 다정하고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추석 연휴에 선생님의 초대를 받아 나가노 신슈의 산장을 방문한 것이 무엇보다도 다행이었습니다. 직접 픽업을 나와서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내어주시고, 유명한 음식점에 한 군데라도 더 데려다주려고 애쓰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황망한 소식을 듣고 마음을 잡지 못할 때 올리비아 랭의 문장이 위로가 됐습니다. "예술은 상처를 치유하면서도 모든 상처에 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모든 흉터가 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선생님의 글은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미술 순례 1' 출간 북토크에서 '일본 미술 순례 2' 출간을 비롯해 선생님과 함께 일본 미술 순례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는데, 그 여행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네요.

남겨진 자인 저는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 예측할 수 없지만, '글을 쓴다'라는 행위를 통해 내 역할을 완수하고 이 과제를 공유하는 이들과 연대하고 싶다"던 선생님의 소망을 기억하려 합니다. 치열했던 선생님의 글과 사유를 공유하고 고민하는 사람으로 남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당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글을 쓴다는 것은 빈 병에 편지를 넣어 바다에 흘려 보내는 것'이고, 선생님의 편지는 빈 병에서 꺼내어져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닿고 있으니까요.

선생님과 함께 디아스포라영화제를 만들어갈 수 있어서, 인천을 소개해드릴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외로웠지만 결코 외롭지 않았던 당신의 생애와 글을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평안하세요.

/정지은 디아스포라영화제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