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이후론 사라진 '당연한 공간'
예전의 오피스텔 맞은편 새로 계약
한권씩 묶일 책들 생각하면 실웃음
딸도 이것저것 챙기느라 바쁜손길
매주 한번씩 복층서 같이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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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소설가
스마트폰 인터넷뱅킹 앱을 켜놓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각각의 통장을 들고나는 액수를 가만히 본다. 한 달에 얼마큼씩 빠지면 티 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다시 말해, 화면에 도도독 찍힌 잔액 중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돈은 얼마큼일까. 물론 그런 액수란 애초 존재하지 않겠지. 잔액이란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지 들어내서 좋은 액수란 없는 거니까. 그래도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곰곰 계산했다.

하지만 내 계산 따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오피스텔 임대인의 마음이다. 뱅킹 앱을 접고 다시 부동산 앱을 켰다. 양재역 뱅뱅사거리 근처 오피스텔 월세는 만만치 않다. 게다가 관리비까지 보태야 하니 말이다. 나는 작업실로 쓸 오피스텔을 구하는 중이었다.

"네가 왜? 작업실을 왜 따로 구해?" 친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말이다. 나는 집에 어엿한 서재가 있다. 커다란 책상이 두 개나 있고, 편백나무로 짠 책장이 있고, 편안한 의자도 있다. PC도 새로 세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나는 작업실이 필요할까. 나는 우물쭈물하다 친구에게 대답했다. "그냥, 갖고 싶어서." 그런 거다. 그냥 나는 작업실이 갖고 싶은 거다. 내 대답이 나도 어처구니없어 웃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작업실은 구해야겠다. 평소 갖고 싶은 것이 많아 카드빚 쌓는 사람도 아닌데, 내 인생에 작업실 하나쯤 선물하는 게 뭐 어떻다고.

끝내 오피스텔 계약을 마치고 이번에는 평면도를 들여다 보았다. 소설을 쓰는 책상은 창가에 두고, 그림 작업을 할 긴 책상은 가운데에 두고…. 그렇게 색연필로 표시를 하고 있으니 열 살 딸아이가 참견을 한다. "이건 뭐야? 이 네모난 건?" 아이가 가리킨 건 복층 도면이다. "그건 이층이야. 거긴 매트리스 두고 가끔씩 피곤하면 누울 거야."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층이 있다고? 여기가 이층집이라고?" 엄마의 작업실 이야기에 심드렁했던 아이가 갑자기 신이 났다. "엄마, 나도 여기 가도 돼? 나 이층에서 자도 돼? 내 책상도 놔줄 거야?" 말이 많아진 아이를 곁에 두고 적당한 책상과 커피머신과 주전자와 쿠션을 고르려니 정신 사납다. 작업실에서 잠을 잘 생각은 없지만 혹시 모르니 화장품도 구비해 두어야 하고 옷가지도 좀 두어야 하고, 정수기는 어쩌지? 공기청정기와 가습기도 사야 하나? 점점 머리가 아파왔다. 공연한 짓을 벌인 건가? 의자는 왜 또 이렇게 비싸담?

사실 작업실이라는 공간은 그동안 나에게 매우 익숙했다. 작가가 된 이후 나는 직장을 다니든 다니지 않든 늘 작업실을 따로 가져왔다. 그 당연한 공간이 사라진 건 출산 때문이었다. 열 살 아이가 자라는 동안 꼭 십 년을 작업실 없이 살아왔다. 십 년 만에 나는 나의 마지막 작업실이 있었던 오피스텔 바로 맞은편 오피스텔을 새로 계약한 것이다. 그 사실은 뭔가 내 마음을 조금 새초롬하게 만들었는데, 그게 구멍 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인지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하겠다.

필요한 물건들을 결제하면서 잔액은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는 중이지만 그곳에서 한 권씩 한 권씩 묶일 책들을 생각하면 속없는 사람처럼 실실 웃음이 난다. 별로 좋아하지 않아 팬트리에 쌓아두었던 차도 작업실에 챙겨갈 생각이다. 내 작업실은 틀림없이 작가 친구들의 사랑방이 될 테니까 그들을 위한 준비물인 셈이다. 목요일마다 카페에서 만났던 그림 친구들도 이젠 내 작업실로 올 것이다. 아무래도 그들을 위해 커피머신은 조금 좋은 거로 사야겠다. 딸아이가 조용하길래 방문을 열어보니 바쁘다. 상자 하나를 가져다 두고 제 물건들을 챙기고 있다. 미술학원에서 그렸던 그림 두 장, 손거울, 일기장, 담요, 공깃돌과 큐브. "뭐 하는 거야?" 물었더니 "엄마 작업실에 가져갈 것들. 내가 쓸 물건들이야" 한다. 이봐, 이봐. 거긴 내 작업실이라고. 소설가 21년차에 접어든 내가 딱 다섯 권의 책을 더 내려고 통장을 턴 곳이라고. 그러면서도 나는 입이 헤벌어진 딸을 보며 생각한다. 매주 한 번씩은 작업실 복층 매트리스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같이 잘까? 하는 쓰잘머리 없는 생각.

/김서령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