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정의의 실현을 빙자해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계획적으로 살해하고 우발적으로 노파의 여동생까지 살해한다. 자수한 뒤 진행된 재판에서 확정된 처벌은 시베리아 8년 유배형. 심신미약, 과거의 선행, 예심판사의 호의로 죄의 무게가 확 가벼워졌다. 지금의 현실이라면 두 생명을 지운 대가로는 터무니 없다는 여론이 들끓었을 테다.
"300명 이상을 직접 죽였고, 간접적으로 가담한 것까지 포함하면 3천명 가까이 죽였다"고 밝힌 유튜브 스타가 있었다. 존 자이로 벨라스케스, 콜롬비아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시카리오(암살자)였다. 1989년 대선후보 살해혐의로 30년 형을 선고받고 2014년 가석방된 뒤 "잘못을 참회하겠다"며 유튜브에 '참회하는 뽀빠이'라는 채널을 개설했다. 희생자들의 유족들은 "피해자를 모욕하는 행위"라며 분노했다.
생명이 있는 인간은 무궁무진한 기회를 갖는다. 빈민의 고혈을 빨던 고리대금업자가 개과천선한 스크루지가 될 수 있다. 벨라스케스가 살해한 수백, 수천명 중엔 콜롬비아의 역사를 바꿀 인물이 포함됐을 수도 있다. 살아있으면 가능했던 인간의 기회와 권리들을 죽음으로 소멸시킨 살인죄를 모든 문명이 엄단한 이유이다.
지난 18일 인천지방법원은 한 스토킹 살인범에게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31세인 살인범은 지난해 자택에서 출근하던 옛 연인인 30대 여성을 살해했고, 이를 말리던 여성의 모친을 상해했다. 살인 현장엔 여성의 어린 딸(6세)도 있었다.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지만 재판부는 "피고인의 생명을 박탈하거나 영구 격리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인간의 생명을 끊는 살인은 불가역적인 인권유린 범죄이다. 살인범죄에서 피해자의 인권은 주체의 소멸로 모호해진다. 반면 가해자의 인권은 산 자의 것이라 실체적이다. 법원은 생명의 엄중한 의미에 짓눌려 살인범의 생명 박탈에 극도로 신중하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인권이 역전되고, 피해자의 유족들은 정의에 못미치는 처벌에 반발한다.
피해 여성이 자연 수명 동안 누렸을 인간적 권리는 가해자의 25년 징역살이와는 결코 바꿀 수 없는 가치이다. 피해자의 딸이 평생 감당해야 할 고통에 비하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죗값이다. 죄와 벌의 저울대가 균형을 잃으면 정의가 무너진다. 피해자의 인권으로 저울대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