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처럼 느껴지는 강력한 현실성
흑인여성 출소후 아들 데리고 도주
가족과 온기 나누며 버틴곳 '10-01'
영화밖 '무수한' 사람들의 공간 상징
영화의 무대는 1990년대 뉴욕의 할렘가이다. 주인공 이네스(테야나 테일러)는 교도소에 잡범으로 수감되었다가 막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흑인 여성이다. 자유의 몸이 된 그녀는 유일한 가족인 아들 테리(에런 킹슬리 아데톨라)를 찾아간다. 여섯 살인 테리는 자기를 놔두고 감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그녀를 원망하고 외면하지만, 이네스는 위탁 가정을 전전하던 테리의 불행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한다. 결국 이네스는 병원에 입원해 있던 아이를 몰래 데리고 할렘가로 도주한다. 아이를 납치한 것이다. 영화는 마치 실화에 기반한 듯 보이지만 잘 쓰인 시나리오이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실화보다 실화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건 영화가 지니고 있는 강력한 현실성 때문이다.
이네스는 간신히 머물 곳을 구해 할렘가에 정착하여 아이를 보살피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비루한 일상과 고단한 현실뿐이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에서 이네스는 살아남기 위해 그야말로 고군분투한다. 분투의 상대는 뉴욕시, 아니 세상 전체다. 아들 테리는 걸핏하면 경찰로부터 불심검문을 당하고 이네스는 위조한 아들의 서류가 들통날까 노심초사한다. 부엌과 목욕탕의 타일이 떨어지고 비가 오면 여기저기 빗물이 새는데도 백인 건물주는 그들을 내쫓을 궁리만 한다. 영화 속 이네스의 독백처럼 흑인 여자를 동정하는 사람은 흑인 여자뿐이고 그나마도 늘 그렇지는 않다.
이 영화의 주인공 셋은 모두 삶이 망가진 사람들이다. 영화 중반 이네스와 함께 가정을 꾸리게 되는 러키(윌리엄 캐틀렛) 또한 감옥을 자주 들락거리는, 망가진 삶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영화가 중반에 이르면 이네스와 러키 둘 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존재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그들은 테리를 자식으로 돌보며 가족을 이룸으로써 악순환에 마침표를 찍고자 한다. 부부가 된 이네스와 러키는 자신들과 같은 불행이 테리에게 반복해서 일어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쓴다. 자신들이 갖지 못한 것을 아이에게는 꼭 주고 싶다는 소망이 그들로 하여금 가족을 이루게 한 것이다. 아이가 훌륭하게 성장하면서 두 사람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위조한 서류가 들통나면서 이네스는 다시 테리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영화는 중간중간 뉴욕의 할렘가를 긴장된 부감샷으로 비추는데, 그럴 때마다 새로 시장이 된 정치인이 '더 나은 뉴욕'을 외치며 주민들의 협조를 당부하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그들이 말하는 '더 나은 뉴욕'이란 아마도 할렘가가 사라져 가난한 흑인들이 보이지 않는 깨끗한(?) 도시일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의 장르는 범죄물로 분류되어 있으나, 영화의 본질은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더 큰 사회적 범죄를 겨냥하고 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어 사우전드 앤드 원(A thousand and one)'의 정확한 뜻을 몰랐다가 영화 중반 세 가족이 살고 있는 할렘가의 집 문 앞에 '10-01'이라는 번호가 적힌 장면을 보고 비로소 궁금증이 풀렸다. 낡은 문이라 가운데 연결된 하이픈(-)이 떨어져 나가 '1001'처럼 보이는 곳, 그곳은 삶이 망가진 세 사람이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던 공간이다. 그러니까 자꾸만 내몰리는 곳에서도 어떻게든 버티며 삶의 온기를 나누며 살아가던 '무수한(a thousand and one의 뜻이기도 한)' 사람들의 공간이다. 영화가 끝난 지금, 그곳에는 가족이 살지 않는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