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문자를 바꾸고 어떤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다. 번역은 정보교류의 차원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와 만나고 또 다른 세계를 이해하는 창구와도 같다.
일본의 고등교육을 대표하는 도쿄대학도 원래는 서양의 앞선 문헌과 문물을 번역하고 소개하기 위해 설립한 번역 기관, 즉 양서조소(洋書調所)에서 시작됐다. 1985년 인문학 서적으로는 이례적으로 초유의 베스트셀러가 됐던 도올 김용옥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의 핵심적 주제도 바로 번역이었다. 번역을 빼놓고 한중일의 근대, 아니 그 역사와 문화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 지성사를 대표하는 인물인 마루야마 마사오도 번역 없는 일본의 근대란 상상할 수 없으며, 근대는 번역된 것이라 단언한다. '번역과 중국의 근대'를 집필한 쩌우전환(鄒振環)도 중국 근대사회를 이해하는 핵심으로 번역을 꼽으면서 가장 영향력이 큰 번역서 100권을 선정하고 번역사를 배제한 중국사는 있을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쩌우전환에 따르면 중국의 번역사는 "민족번역(民族飜譯), 불전번역(佛典飜譯), 서학번역(西學飜譯)" 등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가운데서도 영향력과 규모의 측면에서 보면 서학번역이 앞선 두 단계를 압도한다고 말한다.
번역이 정보 교류와 문명의 발전을 동반하는 일이라면 통역은 언어가 달라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을 옮겨주는 소통의 행위다. 고려 시대에는 역관을 가리켜 혓바닥 사람 즉 설인(舌人)이라 무시했고, 조선 시대에도 국제적 감각을 지닌 지식인 집단이었던 역관이 중인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이들이 없었다면 국제 교류나 외교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전문적인 외국어 능력을 갖추지 못해도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통번역에 문제가 없는 시대가 됐다. 삼성전자가 17일 미국 새너제이에서 공개한 갤럭시 S24는 통역 설정 버튼 하나로 13개국 언어가 지원된다고 한다.
통번역의 핵심은 소통인데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와 정치인의 말은 여전히 어렵고 모호하며 믿을 수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정치인들의 거짓말도 잡아내고 그 의미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자동 정치번역기도 개발되면 좋겠다.
/조성면 객원논설위원·문학평론가